"전(前) 대통령 이승만 박사와 동부인(同夫人) 프란체스카 여사는 29일 상오 8시 45분 CAT 항공사 소속 전세기편으로 김포 국제공항을 떠나 하와이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1960년 5월 이승만 대통령이 쓸쓸히 망명길에 오르자 신문은 호외를 냈다. 이승만은 "지금 내 입장에서 무슨 말을 하겠소. 다 이해해주고 그대로 떠나게 해주오"라고만 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Nothing… I love Korea"(아무 말도…한국을 사랑합니다)라고 했다. 부부의 짐은 보스턴백 4개, 양산 2개, 10년 쓴 라이터 1개, 지팡이 1개뿐이었다.

▶망명을 뜻하는 영어 asylum은 고대 그리스어 asylia에서 왔다. 아테네의 테세우스 신전(神殿)은 주인에게 학대받은 노예에게 피신처를 제공했다. 주인이 그 노예를 다른 사람에게 팔도록 주선하기도 했다. 중세 서양에선 노예가 교회로 도망쳐오면 주인이 성경에 손을 얹고 잔혹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해야 돌려줬다.

▶서양 지성사는 망명 지식인의 역사다. 데카르트는 네덜란드로, 볼테르는 영국으로, 홉스는 프랑스로 망명했다. 마르크스는 망명지 런던에서 '자본론'을 썼다. 19세기 말~20세기 초 프랑스 파리는 망명자의 천국이었다. 레닌·하이네·쇼팽을 받아들였다.

▶정치인은 망명을 해도 천수(天壽)를 누리기 힘들었다. 트로츠키는 멕시코에서 살해됐고, 김옥균은 홍종우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맞은 뒤 시신이 송환돼 능지처참을 당했다. 소모사 전 니카라과 대통령도 망명지에서 암살당했다. 1945년 동유럽 공산화는 왕족 망명 사태를 일으켰다. 시메온 2세 불가리아 국왕은 55년 동안 스페인에서 망명생활을 했다가 2001년 조국으로 돌아왔다. 루마니아 국왕도 1948년 영국으로 망명했다가 차우셰스쿠 정권이 민중봉기로 무너지자 1992년 귀국 허락을 받았고, 5년 뒤 시민권도 회복했다.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보름 넘게 이어진 반정부 시위로 궁지에 몰렸다. 독일 정부가 건강검진 하러 오라며 '명예로운 망명'을 제안했다고 한다. 23년 동안 독재권력을 휘둘렀다가 지난달 시민 혁명으로 쫓겨난 벤 알리 전 튀니지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로 도망칠 때 746억원어치 금괴를 빼돌렸다. 안팎으로 퇴진 압력을 받는 무바라크가 과연 명예로운 망명을 선택할지 두고 볼 일이다. 되돌아보면 이승만만큼 망명 과정과 뒷소문이 지저분하지 않았던 지도자도 드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