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도윤희(50)는 한두 달이면 20다스들이 연필 스무 상자(4800자루)를 몽땅 쓴다. 그는 캔버스 위에 유화 물감으로 바탕색을 칠하고, 그 위에 연필로 점을 찍거나 선을 그어 형태를 표현한다. 연필 가루가 떨어지는 걸 막기 위해 바니시(varnish·투명 도료)를 칠한 후 마를 때까지 보름을 기다린다. 그 위에 다시 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바니시를 바르기를 반복한다. 한 작품에 걸리는 시간은 평균 2~3년. 완성된 작품 표면은 유약 바른 도자기처럼 매끈하지만, 측면을 들여다보면 지층(地層)처럼 연필 층이 켜켜이 쌓여 있다.

23일부터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 신관에서 개인전 'Unknown Signal'을 여는 작가는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흔적을 층위를 쌓듯 캔버스에 남기고 싶다"면서 "연필 층을 쌓고 바니시를 칠할 때마다 지나가버린 시간의 창(窓)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연필은 '쌓인 시간'의 상징이다. "연필심, 흑연은 오랜 세월을 거쳐 땅속에서 생성된 광물이니까요."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인근 강물에서 받은 인상을 표현한 설치작품‘Unknown Signal’과 함께한 도윤희. 야광 물감을 칠한 캔버스에 윗부분만 살짝 붙인 한지들이 1분 20초 간격으로 점멸하는 조명 아래에서 물결처럼 살랑거린다.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들은 약 40점. 가로 1m41㎝, 세로 2m44㎝가량의 캔버스 세 개가 한 폭으로 구성된 대작(大作) '읽을 수 없는 문장'(2010~2011)은 2005년 가을 작가가 캄보디아 씨엠립에서 배를 타고 앙코르와트로 가던 중 바람에 물결이 일렁이고 햇살이 반짝일 때 생각한 것을 담았다. "자연이 인간은 알 수 없는 신호를 서로 주고받고 있구나." 멀리서 보면 캔버스 위에 물감으로 오래된 나뭇결을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연필로 무수히 많은 점을 찍어 무늬를 만든 것이다. "처음엔 3H나 2H 정도의 연한 연필로 시작해서 점차 진한 연필로 점을 찍었어요. 마지막엔 흑연 덩어리 같은 9B를 가지고 작업했죠." 연필 층위 하나를 만드는 데 평균 열흘이 걸렸다. 독백 같은 노동에 대해 "남들이 보면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내겐 몰입과 해소의 즐거움을 줬다"고 했다.

시간의 흔적이 녹아 있는 재료를 아예 화폭으로 쓴 작품도 있다. 드로잉 10여점은 금·은박 포장지를 밋밋한 뒷면이 보이도록 유리상자에 넣어 8년간 햇볕을 쬔 후 누렇게 빛바랜 뒷면에 그림을 그렸다. "100장을 상자 안에 넣었는데 70장가량이 완전히 바스라져 30장 정도만 사용할 수 있었어요. 누런 갱지처럼 보이는 작품을 뒤집어보면 반짝이는 은박지가 나오죠. 생(生)의 양면성과 시간을 함께 담아보고 싶었달까요?"

도윤희는 성신여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90년대 초 미국 시카고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마이애미 아트 페어(1998)를 비롯한 각종 국제 아트페어에서 주목받았고, 2007년엔 아시아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스위스 바이엘러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꽃과 항아리의 화가'로 불리는 도상봉(1902~ 1977) 화백의 손녀지만 이제 '도윤희'라는 이름만으로도 충분할 만큼 지명도가 높아졌다. 고 1때까지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그녀는 "별채 작업실에서 맡은 물감과 과일(정물화 소재)이 섞인 냄새, 과일 그림이 실제와 똑같아 신기해했던 느낌이 아직도 또렷하다"고 했다. 추상을 하는 도윤희가 "내 작품의 서정성은 알게 모르게 (구상화를 했던)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그래서 어색하지 않다.

▶도윤희 개인전 'Unknown Signal', 23일~4월 24일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 신관 (02)2287-3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