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 정·사회부 차장

2년 전 일본 교토에 있는 귀무덤을 찾아갔다.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이 살해한 조선 백성들의 코를 잘라 염장(鹽藏)한 무덤이다. 코무덤이란 말이 너무 잔혹해 귀무덤이라 불렀다니 자신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는 아는 모양이다.

무덤에 세워진 안내판엔 "전란으로 입은 조선 민중의 수난을 역사의 교훈으로 남긴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전란의 수괴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혼을 기리는 도요쿠니(豊國)신사 앞에 기념비처럼 조성돼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교훈이라기보다는 전공(戰功)의 상징물로 보였다. 무덤 바로 옆에 어린이 놀이터를 만든 동네 사람들의 무감각도 한심했고, 그곳에서 뛰노는 어린이들이 무덤에 대해 어떻게 배우는지도 궁금했다.

사서(史書)는 염장된 코의 수가 10만명분이라고 전한다. 10만이란 숫자를 접하면 율곡 이이가 전란 전에 제기했다는 '10만 양병론(養兵論)'이 떠오른다. 율곡이 실제로 그렇게 말했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전란 이전이 아닌 이후에 화제가 됐다는 점에서 10만 양병론은 조선의 나약한 군사력에 대한 민중의 통한(痛恨)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저서 '일본사(史)'에서 당시 일본이 임진왜란에 동원한 병력을 15만명으로 추산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몰고 온 선발대만 2만명이었다. 조선은 신립의 군사 8000여명이 탄금대 배수진에서 수장(水葬)된 이후 군사가 고갈돼 가도(街道)를 평양성까지 일사천리로 내줬다. 살육과 기아로 전란 동안 조선의 인구가 3분의 1이나 줄었다는 얘기도 있으니, 10만 양병을 포기한 대가는 코까지 빼앗긴 10만의 목숨에 그치지 않았다. 물론 살아남은 백성도 산목숨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사대부들은 평화를 유지하는 데 국방보다 외교가 값싼 수단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세종이 신기전을 개발할 때 "명(明)과의 관계를 대결구도로 치닫게 한다"며 반대한 것도, 효종이 북벌(北伐)을 주장할 때 "그러다가 나라가 망하면 어찌하겠느냐"고 치받은 것도 그들이었다. 강군(强軍)을 바탕으로 중립외교를 추진한 광해군을 내쫓을 때 내세운 첫 번째 명분도 "대국(大國)에 죄를 지었다"는 것이었다. 오늘로 말하면, 그들은 권력에 대항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착실히 챙긴 좌파였던 셈이다.

그들은 부국과 강병책을 왕권 강화를 위한 구실로밖에 보지 않았다. 오히려 부국강병을 포기하는 것으로 평화와 생존을 보장받으려 했다. 그러다가 왜란(倭亂)이 끝난 뒤 불과 38년 만에 호란(胡亂)의 참화를 당하고, 호란이 끝난 뒤 273년 만에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이 있게 된 것은 하늘이 도운 까닭"이라고 기록한 류성룡의 '징비록'은 조선의 생존을 기적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었던 탄식이 절절하게 묻어 있다.

요즘 '중국에 대한 사대(事大)와 문약(文弱)은 우리 역사에 박힌 유전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해군기지는 주변국에 잘못된 신호를 보낸다"는 정치인들의 주장은 "명과의 관계를 대결 구도로 치닫게 한다"며 반발하던 300년 전 좌파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한·미 FTA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그들이다. 부국도, 강병도 다 싫다는 것이니 그들이 집권하면 대체 무엇으로 국가를 지키고 무엇으로 국민을 먹여 살리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한국사를 보면 태평성대가 100년 이상 이어진 경우가 없다. 한반도를 와이키키 해변으로 옮기지 못하는 이상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불행히도 한국은 말똥게와 맹꽁이 울음소리에 군사 기지를 유보할 만큼 한가하고 사치스런 나라가 못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