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직장의 편집장과 함께 명동의 백화점에 간 적이 있었다. 명품관으로 리뉴얼해 재개관한 그 백화점 안에 유명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숍을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간 자리였다. 백화점에 들르기 전, 잡지사 선배의 결혼식장에서 만난 우리는 예식장 음식은 무조건 맛없다, 라는 말에 쉽게 동의한 뒤 한 태국 레스토랑에서 똠양꿍 같은 음식을 잔뜩 시켜놓고 이런저런 얘길 했었다.

"언니 말이 개그맨 S가 결혼식 사회를 본 게 대여섯 번인가 그런데, 그중에 이혼한 커플이 벌써 다섯이래요." 곱게 웨딩드레스를 차려입은 신부가 어찌나 호탕하게 웃으며 그 얘길 하던지, 나는 선배의 '호연지기'에 감동받아 샐러드를 먹으며 그 얘길 했었다. 물론 개그맨 S가 결혼식 사회를 본 그 선배는 예쁜 아기 낳고 지금까지 아주 잘살고 있지만 말이다.

신세계 백화점 본점 보호벽을 감쌌던 르네 마그리트의 '겨울비'. 신세계 측은 중절모와 검은 레인코트를 차려입은 신사들이 비처럼 내려오는 그림을 위해 1억 원을 지불한 것으로 알려졌다.

길 건너 창가로 '애프터눈 티 카페'가 보이는 오후의 태국 식당에서 두 아이의 엄마이자 패션지 편집장으로 사는 고달픔, 섭외만 담당하는 기자가 따로 있었으면 좋겠다는 푸념, 미국 보그는 에디터들에게 '옷 구입비'를 준다는 확인되지 않는 이야기들과 일과 가정을 어떻게 양립해 황금분할 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들을 조근조근 이야기했었다.

그때, 백화점으로 가는 길에 보았던 거대한 가림막은 르네 마그리트의 '콜콩드 golconde'. '겨울비'란 제목의 그 그림은 푸르스름한 바탕에 중절모와 검은 레인코트를 차려입은 신사들이 마치 비처럼 지붕 위로 내려오고 있는 그림이었다. 공사 중이었던 신세계를 감싸고 있는 가림막이었다. 1년에 그림 저작권료로 신세계 쪽에서 지불한 금액이 무려 1억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신세계 쪽의 결정도 대담했지만, 특정 시기의 한 공간에 대한 이미지로 이 그림이 선택되었다는 것이 나로선 무척 흥미롭게 느껴졌다.

조경란의 에세이 '백화점'은 백화점과 관련된 거의 모든 것들의 이야기다. '백화점의 천재'라 불리는 파리 봉마르셰 백화점을 세운 아리스티드 부시코와 백화점의 역사, 백화점의 상업 전략과 백화점에서 샀던 다양한 물건 이야기…. 집이 날아갈 뻔했던 어느 날, 신생 출판사와 계약을 한 뒤 명동의 롯데백화점에서 산 인생 최초의 잇백(It bag), 조카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사게 된 아동복, 언젠가부터 성글어지기 시작한 머리카락과 부분가발에 대한 단상까지, 에세이는 백화점과 관련된 한 개인의 삶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책에 의하면 그때, 신세계 본점은 전 층을 남성관으로 오픈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런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레인코트 차림의 신사들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마그리트 그림을 선택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건물은 공사 도중 콘셉트를 바꾸어 남성관이 아니라 명품관으로 리뉴얼되었다. 책은 "전 층을 남성관으로 계획했을 당시 신세계 본점이 모델로 삼은 백화점은 일본의 이세탄 백화점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세탄 백화점이 유명해진 데는 몇 가지 이유가 더 있지만 그중 가장 큰 것은 1968년 9월 8000㎡ 규모로 오픈한 남성 신관이다. 세계적으로도 남성만을 위한 별도의 건물은 몇 곳 없던 시절에 이루어진 파격적인 도전이었다"는 것이다.

누군가 명동을 추억할 때, 그것은 칼국수 한 그릇에 대한 '명동교자'의 추억일 수도, 영화 '접속'의 배경이기도 했던 명동의 오래된 LP 레코드점 '부루의 뜨락'과 관련된 이야기일 수도 있다. 명동을 떠올릴 때, 나는 지금은 사라진 미도파 백화점과 그곳에서 샀던 아이보리색 스웨터, 그리고 리뉴얼되기 전 에스컬레이터가 없던 신세계 백화점 본점을 떠올린다.

소설가 K는 백화점 1층에서 나는 화장품과 향수의 인공적인 냄새를 몹시 싫어한다고 말한 적이 있지만,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일상이 완벽히 제거된 그 인공 향들의 조합이 싱그럽다. 자연이 만들어낸 위대한 풍경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지극히 장식적인 물건에도 나는 언제나 감동 받는다.

그러므로 우울할 땐, 맥박이 뛰는 곳에 향수를 바르고 백화점에 간다. 백화점 지하의 빵집을 지나며 갓 구워낸 머핀과 크루아상의 냄새를 맡고, 일층에 올라가 아름답게 진열된 여성용 스카프의 패턴들을 살펴본다. 올해가 가기 전, 조카에게 줄 무릎을 덧댄 바지를 사고, 남편에게 선물할 가죽장갑을 미리 사두는 일과 백화점 3층의 작은 소파에 앉아 하릴없이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을 관찰하는 일이 한낮의 우울을 덜어내는 데 얼마만큼의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가구디자이너들이 그 물건을 사용할 사람의 행동패턴에 대한 이해와 사회적 거리에 대한 분석 자료를 바탕으로 네 가지 카테고리로 분류한 '숨겨진 치수'라는 게 있다. 이를테면 포옹이나 속삭임을 위한 친밀함의 거리는 15.2~45.7㎝, 친한 친구 간의 상호작용을 위한 개인적 거리는 0.45~1.21m, 공적인 대화를 위한 거리는 3.65m 이상. 가구를 디자인하는 일은 가구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는 견고함이나 유용성,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상호작용에 대한 이해 또한 담겨 있어야 하는 것이다."

상품과 상품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상품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헤아리며 걷는 길. 명동의 거리가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백화점의 한적한 옥상 정원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더 아득하고 아름답게만 느껴진다. 문득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이 이상의 '날개'의 주인공이 추락하기 직전 서 있던 곳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미쓰코시 백화점 옥상에 올라가 26년 동안의 일을 생각하며 오후의 사이렌 소리를 듣던 주인공의 선연한 모습을. 어디선가 멀리 음악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백화점: 소설가 조경란이 쓴, 백화점을 직접 조명한 문화 에세이다. 16년 동안 소설가로 활동하면서 체류하거나 여행했던 도시들. 뉴욕, 샌프란시스코, 아이오와, 암스테르담, 파리, 베를린, 도쿄 등지에서 경험한 백화점들. 19세기 말 아케이드에서 출발하여 박람회를 거쳐 백화점으로 진행된 근대 소비문화의 역사. 1920년대 말에 태동한 우리나라 백화점의 변천사와 마케팅과 소비사회에 관한 성찰 등, 현재와 과거, 경험과 기억, 직접적 관찰과 문헌을 통한 사색이 풍성하게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