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를 기다리며

화가
이중섭의 그림책에서
제주도의 먼바다나
통영의 비탈진 낮은 마을
그런 것이 보이는 그림 한 장 떼어서
작은 액자에 넣어 걸어놓고

낡은 테이프
잡음이 좀 나기는 하지만
바하의 관현악 모음곡 제2번 B단조
플루트가 나오는 그것
장난감 같은 카세트에
볼륨 너무 크지 않게 돌려놓고

그리고 꽃이랑 별이 많이 나오는
만화책 한 권 뒤적이면서 기다리기로 한다
날아온 새 한 마리 파란 새 그 한 마리
내 머리나 손바닥에서
쫑긋
쫑긋거릴 때까지

―전봉건(1928~1988)

문득 가을 기운을 느끼니 새삼 아름다운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기다려야만 할 것 같다. 가만 생각하니 진정 마음이 두근거리는 기다림 없이 산 지도 오래되었다. 전화벨도 나쁘고(왜? 8할이 광고 전화다!), 얼룩 묻은 육필(肉筆) 편지도 없는 시대. 실용(實用)과 효율만 있는 시대. 꿈이, 상상이, 초월이 사라진, 여백이 없는 삶이 버겁다. 그런 설레는 기다림이 없는 대신 음악을 듣는다. 인쇄한 그림을 액자에 넣어 진정 그림을 즐기는(자랑하는 것이 아닌!) 이 가난한 시인이 듣던 바흐를 골라 듣는다. 수석(壽石)을 즐겼다는 이 청빈한 시인이 새까만 돌들 세워둔 옆에서 돌들과 함께 들었을 바흐다. 내가 듣는 오디오 기계가 이 낡은 카세트보다 수십 배는 비싼 것일 테고 음질도 나을지 모르겠지만 결코 새가 오지는 않으리라. 나는 바흐의 선율을 타고 시인의 방을 찾아간다. 예술가들이 모였고 못 보던 새가 시인의 머리에, 손바닥에 앉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