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근대 세계를 변화시킨 가장 큰 힘 중 하나는 분명 과학기술이다. 그것은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해 주었지만 동시에 자연환경과 공동체를 파괴하기도 했다. 과학기술이 사회와 자연을 착취하고 약탈하는 대신 가난한 이웃을 돕고 환경을 보호하는 선한 목적에 봉사하게 할 수는 없을까? 그런 사례로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을 들 수 있다.

적정기술은 '한 공동체의 문화적·정치적·환경적인 면들을 고려하여 만들어진 기술'을 말한다. 이는 개발도상국이든지 혹은 이미 산업화한 국가들 내에서도 소외된 빈한한 지역에 알맞은 기술로, 무엇보다 적은 자원을 사용하며, 유지하기 쉽고, 환경에 적은 영향을 미치는 단순한 수준의 기술이다.

현재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에서는 식수가 부족하여 저소득층이 오염된 물을 마실 수밖에 없고, 많은 아동이 종일 먼 길을 오가며 물을 구해오느라 고된 일과를 보내고 있다. 이 문제의 해결에 도움을 준 적정기술 중 하나가 라이프스트로(Lifestraw)이다. 이것은 25㎝ 길이의 플라스틱 튜브 속에 설치된 필터와 화학물질을 이용하여 물을 정화하는 휴대용 정수기로, 웬만큼 오염된 물이라도 바로 마실 수 있게 해 준다. 플레이 펌프(Play Pump) 역시 물 부족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었다. 이것은 쇠바퀴를 돌리는 어린이 놀이기구와 수동식 펌프를 결합하여, 아이들이 쇠바퀴를 돌리며 노는 동안 지하의 물을 끌어올려 지상에 설치된 물탱크에 저장하도록 설계되었다. 바이실라바도라(Bicilavadora)는 전기가 없는 지역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세탁기이다. 드럼통에 자전거를 결합시켜 페달로 작동시키는 방식이고 누구나 손쉽게 이용할 수 있어서, 여성들의 노동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저개발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값싼 재료를 이용해 제작하였다.

미국의 MIT 대학에서는 저개발국과 저소득층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할 과학기술을 연구하는 '디랩(D-Lab)'이라는 교과목을 운영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의 특징 중 하나는 이론과 실습의 통합이다. 교실에서 좋은 아이디어를 개발한 후 방학에 현장 활동을 통해 현지에 적합한 설계를 완성하여 실제로 보급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이실라바도라가 이 수업에서 개발된 사례이다. 과학기술 교육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따뜻한 이해와 연결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