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도 애송시로 사랑받는 러시아 시인 푸슈킨(1799~1837)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의 첫 러시아어 원전 번역은 시인 백석의 작품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시점은 최소 1949년 이전이다.

송준씨는 이달 말 출간 예정인 '백석 번역시 전집'(전 2권·흰당나귀·사진)에서 백석의 일본 청산학원 유학 시절 후배이자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이었던 고정훈(1920~1988)씨의 생전 증언을 토대로 이렇게 밝혔다. 분단 후 북한에서 펴낸 '뿌쉬낀 시집'(1949) '뿌슈낀 선집'(1955) 등의 번역자로서 백석이 푸슈킨 전문가임은 알려졌지만, 이 시의 번역 사실은 알려진 바 없었다. 백석이 번역한 두 권의 시집과 선집에 '삶이…'가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연은 이렇다. 고씨는 청산학원 중학부 재학 시절 청산학원 대학부에 다니던 여덟 살 위 백석을 큰형처럼 따랐다고 한다. 광복 이후 백석은 고향이 있는 북에 남았다. 남을 선택했던 고씨는 6·25가 발발하면서 국군 장교로 참전했고 그해 10월 국군의 평양 수복 당시 백석과 해후했다고 했다. '형님 백석'의 안부가 궁금해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찾았다는 것이다. 이때 백석은 푸슈킨의 '삶이…'를 좋아해 러시아어로 수백 번 암송한 후에 우리 말로 번역했다고 말했다.

또 1949년 출간된 '뿌쉬낀 시집'에도 넣으려고 제출했지만, 공산정권의 검열로 빠졌다는 이야기도 했다. 삶의 근원적 슬픔과 허무를 노래하는 이 시의 미학이 정권의 이념과 맞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가 조치를 받은 것이다. 서정시를 쓰지 못하는 시대에 차선으로 번역을 선택했지만, 번역마저 이념의 눈치를 봐야 했던 공산주의 체제하 시인의 아이러니인 셈이다.

서울대 노문과 박종소 교수는 "일제 강점기 일본어 중역으로 이 시가 국내에 알려졌지만, 러시아어 원전으로 번역한 사람은 아직 알려진 바 없다"면서 "추후 자세한 검증이 필요하겠지만, 가능성 있는 일"이라고 했다. 푸슈킨 문학 전문가인 고려대 노문과 석영중 교수 역시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했다. 국내에서는 1950년 2월 5일 출간된 '푸쉬킨 시집'(세종문화사·조영희 옮김)이 현존하는 최초의 번역시집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