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경 기자

"셰익스피어를 만난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요? 거 참 어렵네. (잠시 궁리하다) 악수만 하고 치우지 않을까. 내 성격이 그래요. '당신이 나한테 선생님이요' 같은 말은 못하지."

그러곤 웃는데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천진해 보였다. 일제강점기 도쿄 유학 시절 셰익스피어 희곡에 감복한 뒤 70년간 이 대문호를 파고든 여석기(呂石基·91·국제교류진흥회 이사장) 고려대 명예교수다. 자서전 '여석기 나의 삶, 나의 학문, 나의 연극'(연극과인간)을 쓴 그를 4일 오후 서울 종로 국제교류진흥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1942년 동경제대 영문과의 셰익스피어 강좌에서 펄펄 살아 있는 극작가로서 셰익스피어가 나에게 와 닿았어요. 그래도 '햄릿이 미치광이 노릇을 한 것인가 아니면 진짜 미쳤는가' 같은 질문을 푸는 일이 평생의 과업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연극 평론가 1세대인 여 교수는 국내에서 문학으로서의 셰익스피어와 연극으로서의 셰익스피어를 아우른 최초의 학자다. 인생 자체가 '셰익스피어와의 동행'이다. 귀국해 대학 강단에서 셰익스피어를 가르쳤고 1964년 한국셰익스피어학회를 창립했다. 1인 잡지 '연극평론'을 발행해 연극 평론가를 키웠다. 1962년 드라마센터 개관작으로 올라간 '햄릿'을 비롯해 번역본도 여럿 펴냈다.

햄릿의 마지막 대사는 "The rest is silence"다. 여 교수는 "이 문장은 번역이 여러 갈래인데, 아무리 매만져도 원문으로 읽은 느낌이 안 난다"고 했다. "나머지는 침묵"이라며 명사로 맺은 자기 번역도 "참 싱겁다"며 겸연쩍게 웃었다. 그 유명한 "사느냐 죽느냐(To be or not to be)…"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다. "우리말 어순으론 '죽느냐 사느냐'로 해야 맞는다"는 것이다. 해외에서 호평받은 오태석 연출의 '템페스트'에 대한 감상을 묻자 "그건 오태석이지 셰익스피어는 아냐"라는 답이 돌아왔다.

1922년 경북 김천에서 천석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자서전에 가족사와 징용 등의 기억, 학문과 연극에 대한 회고담을 담았다. 도쿄 유학 시절 헌책방에서 일 년치 등록금을 털어 미국 연극 잡지 72권(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소장)을 산 일에 대해 여 교수는 "소심한 나로서는 이만저만 큰 결심이 아니었다"고 술회했다.

청력이 좋지 않고 거동도 불편해 2~3년 전부터는 연극을 못 보고 있다. 하지만 애착은 식지 않았다. 여 교수는 "연극은 죽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사람이 사람 그리울 때가 있을 거 아녜요. 수명만 길어질 뿐 생로병사는 다 있으니 태어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늘 그랬듯 소수가 좋아하는 현장 예술로 남겠지요. '연극은 매일 밤 죽고 이튿날 살아난다'는 말도 있습니다."

연극이 요구하는 사람을 기르고, 연극 발전에 쓴소리를 하고, 연극 비평을 개척했다는 게 그의 보람이다. 국내 연출가가 숱하게 올린 연극 '햄릿' 중 가장 좋았던 작품을 묻자 "유감이지만 하나도 없다"고 즉답했다. 연극인 특히 배우에게 들려주고 싶다며 말을 이었다.

"감동의 시작은 배우입니다. 디테일이 중요해요. 손을 살짝 움직이는 것,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만으로도 어떤 배우는 관객을 집중시킵니다. 어렵더라도 계속 연극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