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훈 특파원

프랑스 남동부 작은 도시 안시(Annecy)에 지난 12일 도착했을 때 멀리 만년설을 머리에 인 알프스 산맥과 푸른빛의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이날 점심때 구(舊)도심을 가로지르는 좁은 운하를 따라 늘어선 레스토랑에는 '안시 2013'이라는 패찰을 목에 건 사람들로 빈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지난 10일 시작해 15일까지 열리는 '안시 애니메이션 국제 페스티벌'에 참석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다. 어떤 식탁 위에선 노트북과 책자를 올려놓고 '미니 작품 설명회'가 열렸다. 애니메이션(만화영화)을 사고팔거나 전문 인력을 채용하기 위한 자리다. 식당 '르 프레티'의 종업원 장 브륀씨는 "이맘때면 늘 벌어지는 풍경"이라고 말했다.

인구 5만명에 불과한 휴양 도시 안시는 매년 6월이면 전 세계 애니메이션의 수도(首都)로 바뀐다. 현재 전 세계 애니메이션과 그 연관 산업을 합한 총 규모는 2228억달러(약 251조원). 1960년 시작된 '안시 페스티벌'을 비롯해 캐나다의 오타와, 일본의 히로시마,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 등 세계 4대 애니메이션 축제가 이 산업의 중심에 있다. 그중에서 안시 페스티벌은 참가 작품 수와 방문객 수에서 최대라는 평가를 받는다. 올해 이곳을 찾은 방문객 연인원 수는 약 5만명이다. 11만장에 달하는 행사장 입장권도 일찌감치 매진됐다.

프랑스 남동부 인구 5만명 소도시 안시에서 열린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을 찾은 시민과 관광객들이 지난 12일 야외 잔디밭에 앉아 상영 중인 애니메이션 작품을 보고 있다. 한국은 코트라 주관으로 올해 11개 기업이 참여했다.

페스티벌 기간에는 온통 '애니메이션' 관련 행사가 열린다. 호수 주변 잔디밭에선 한 초등학교 학급이 방금 본 환경 관련 교육 애니메이션을 소재로 야외 수업을 진행 중이었다. 저녁이 되면 이 잔디밭에 대형 스크린이 내걸리고 애니메이션이 상영된다. 낮엔 '살르 레 자라' 등 소규모 극장에서 계속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안시의 애니메이션·그래픽 전문학교인 '고블렝 안시' 재학생 티에리(19)는 "3D(입체영상) 등 새로운 영상 기술을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안시가 세계 최대 규모의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을 여는 도시가 된 것은 소규모 도시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 육성 전략 덕이다. 페스티벌 집행위원장 도미니크 퓌토(Puthod) 부시장은 "다른 도시는 특정 산업을 키우려면 세금 혜택 등으로 관련 기업부터 끌어들이려 하지만, 안시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대신 시민을 타깃으로 했다. 이들이 애니메이션을 즐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애니메이션 산업이 커질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우선 1980년대부터 초·중등학교에 애니메이션 제작을 지원하는 과정을 조금씩 늘려나갔다. 어릴 때부터 애니메이션을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창작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한 것이다. 애니메이션 전문 아틀리에를 만들어 일반 동호인들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 또 페스티벌 기간 '길거리 상영'을 늘려 지역 주민들이 좋은 작품을 선정해 시상하는 제도도 운용했다. 퓌토 부시장은 "안시 시민이라면 누구나 애니메이션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애니메이션에 친숙한 도시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관련 산업을 끌어들이는 효과를 가져 왔다.

현재 안시와 주변 인근에 있는 애니메이션 전문 기업과 단체는 10곳이다. 파리와 리옹을 제외하면 프랑스에서 가장 많다. 이곳에 어릴 적부터 애니메이션을 접한 안시 출신 젊은이들이 취업하는 경우도 많다. 안시의 도시경제 담당 마리 노엘르 프로방(Provent) 부시장은 "시민을 대상으로 직접 특정 산업에 대한 정보와 기술을 제공해 육성할 수 있는 것이 소도시만이 가질 수 있는 경쟁력"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