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 문화부

"어느 블로그 운영자가 '태권 브이는 표절작'이라는 글을 올렸다. 그랬더니 욕설 댓글과 반박·재반박으로 금세 게시판이 엉망이 되더라." 한 네티즌의 말처럼, '태권 브이 표절 문제'는 인터넷 게시판에서 정치적인 사안 못지않게 논쟁이 잘 불붙기로 유명한 주제다. 1970~80년대 유년 시절을 보낸 30~40대들이 많은 추억을 갖고 있는 데다, 한·일 간의 민족 감정과도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광복절을 맞아 독도에 높이 13m짜리 태권 브이 철제 조형물을 세우겠다'는 한 조각가의 구상이 본지에 단독 보도되면서 이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일본 만화 표절 의혹이 일고 있는 로봇을 왜 독도에 세우려고 하느냐"는 얘기다. 1976년 김청기 감독의 장편 애니메이션 '로보트 태권 브이' 개봉 당시 다섯 살이었을 그 조각가는 네티즌의 비난이 빗발치자 모금 운동을 중단한 상태다.

태권 브이의 외모가 4년 앞서 나온 일본의 '마징가 제트'를 본떴다는 것은, 사실 그 시절 공책 뒷장에 수도 없이 연필로 두 로봇을 그려 봤을 세대에겐 싱거울 정도로 분명하다. 마징가의 각진 뿔을 곡선으로, 빗살 모양 입을 원형으로 바꾸는 등 약간의 변형을 거친 캐릭터가 태권 브이다. 모두 '로케트 주먹'을 사용하는 데다, '쇠돌이'(가부토 고지)의 할아버지가 마징가를 만들고 죽은 것처럼 '훈이'의 아버지는 태권 브이를 남기고 죽는다.

하지만 '태권 브이는 표절작이므로 이제 그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에는 쉽게 동의할 수 없다. 표절작이란 단정만으로는 설명이 어려운 시대적 정서와 공감이 태권 브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아톰·마징가 같은 일본 로봇들만 판치던 시절, 제대로 된 마케팅과 함께 극장에 걸린 첫 '국산 로봇'이 태권 브이였다. 마징가와는 달리 태권도 3단 실력의 격투기를 구사했고, '메리'처럼 선과 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는 점도 일본 만화와는 다른 요소였다.

당시 문화력으로는 일본 만화의 영향을 뛰어넘을 수 없었지만, 40년이 가까운 지금까지도 한국의 대표 로봇 캐릭터로 자리 잡는 데는 나름대로 힘이 있었다. "달려라 달려 로보트야…"로 시작되는, 최창권이 작곡하고 최호섭이 부른 주제가 역시 아직도 누군가의 가슴을 뛰게 한다.

'처음에 잘못된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가치를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는 그 뒤의 긴 역사까지 한꺼번에 파묻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일제(日帝)가 만든 서울시청사 건물을 허물자'는 주장은 그 건물이 1926년부터 19년 동안 '조선총독부 경성부청'이었다는 것만 볼 뿐, 60년 넘게 '대한민국 서울시청'이었다는 사실은 외면하고 있다. 애국가 작곡가에 대해 친일 논란이 있다 해서, 몇 세대에 걸쳐 국가(國歌)로 애창돼 온 사실까지 무시할 수는 없다. 태권 브이의 일부 표절은 인정하면서도 우리 문화 DNA에서 결코 '말끔하게' 그것을 지워버릴 수는 없는 이유다. 이제 그런 정도의 자신감과 여유는 가져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