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재건최고회의 외무국방담당 최고위원 시절의 김재춘 전 중앙정보부장.

5·16 주체의 한 사람인 김재춘(金在春) 전 중앙정보부장이 2일 타계(他界)했다. 향년 87세. 조선일보는 '피플앤스토리(people&story)' 면의 ‘추억人’코너에서 그의 죽음을 크게 다루었다. 1980년대 이후 오랫동안 잊혀졌던 인물이지만, 그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물굽이를 바꾼 사람 중의 하나다.

기자는 2001년 5·16 40주년을 맞아 라는 제목의 기사를 쓰기 위해 김재춘 전 중앙정보부장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김재춘 전 부장을 만난 것은 마포에 있는 5·16민족상재단 이사장실에서였다. 이 무렵 5·16민족상재단 사무실은 70대 중반에 접어든 5·16 주체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었다. 화색이 도는 둥글둥글한 얼굴의 김 전 부장은 방첩부대장(지금의 국군기무사령부)과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 예비역 장군이라기보다는 옛날 자신이 잘 나갔던 시절에 대해 얘기하기 좋아하는 촌로(村老) 같은 느낌이었다. 인터뷰에는 5·16 당시 대구 주둔 공병대대장으로 쿠데타에 참여했던 임광섭 재단 사무총장이 동석했다.

김 전 부장은 말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박정희 장군이 6관구 사령부에 나타났을 때 술에 취해 있었다”는 등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누가 될 수 있는 얘기도 했다(박정희 장군은 5·16 당시 거사 계획이 누설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윤태일, 한웅진 준장과 함께 술을 마시며 고민하다가 6관구 사령부로 향했다). 동석했던 임광섭 재단 사무총장이 “술에 취해 있었던 것은 아니죠”라고 브레이크를 걸었다.

그러자 김 전 부장은 황급히 “그래, 그래. 지휘를 못할 정도로 술에 취해 있었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그냥 술기운이 있었다는 정도지. 술에 취했다고 쓰면 안 돼요”라며 말을 주워담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얘기하다가 임 사무총장이 “그런 얘기는 안 하시는 게…”라고 눈치를 주면 “이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해요”라며 입을 다물었다.

◇ 5·16혁명의 1등 공신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재춘 전 부장은 5·16혁명 당시 6관구사령부 참모장이었다. 6관구 사령부는 서울 인근 수도권 부대들을 관할하면서 오늘날 수도방위사령부 역할을 하던 부대였다. 6관구 사령부는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인·언론이 군부에 민원이 있을 때 창구 역할을 하는 부대이기도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6관구사령관으로 재직할 때, 김재춘 참모장은 비사교적이었던 박 사령관을 대신해 정치권이나 언론 등을 상대했다고 한다.

1961년 5월15일 밤 이철희(후일 중앙정보부 차장 역임. 1980년대 이철희-장영자 사건을 일으킴) 방첩부대장과 이상국 제30사단장을 통해 쿠데타 음모를 보고 받은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수도권 부대들을 관할하는 제6관구 사령관 서종철 소장(육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역임)에게 예하 부대들을 잘 장악하도록 명령했다. 서종철 사령관은 다시 참모장 김재춘 대령에게 부대 장악을 지시했다. 사령관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참모장이 쿠데타 주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쿠데타를 진압해야 할 부대의 참모장이 쿠데타 주체였으니, 이 이후의 전개과정은 불문가지(不問可知).

김재춘 참모장은 서종철 사령관과 장도영 총장에게 6관구 사령부의 상황이 진정되었다고 허위보고하는 한편, 혁명군측 장교들을 체포하기 위해 헌병 병력들을 이끌고 6관구 사령부에 나타난 헌병차감(憲兵次監) 이광선 대령을 설득해 혁명 지지쪽으로 돌려놓았다.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후일 회고록 《망향》에서 “김재춘 대령이 쿠데타를 성공으로 이끄는 데 제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술회했다. 김재춘 전 부장 역시 당시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5·16이 성공할 수 있었다는 자부심이 무척 강했다. 그의 증언 내내 그런 자부심이 묻어 나왔다. 그러면서도 그는 5·16을 성공으로 이끈 것은 박정희·장도영·윤보선 세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우선 수많은 청년 장교들이 자신의 운명을 걸 정도로 박정희 장군의 신망이 두터웠습니다. 둘째, 장도영 총장은 몇 군데 부대 출동을 차단하고, 몇 사람 잡아 넣으면 사태가 수습될 것으로 쉽게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윤보선 대통령이 유혈사태를 우려해 미군의 진압요청을 거부하고, 전방 지휘관들에게 자제를 당부하는 서한을 발송했습니다. 결국 이 세 분이 혁명을 성사시킨 것입니다.

5·16은 장도영 총장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고, 혁명 주체들로부터 돈독한 신망을 얻었던 박정희 장군의 ‘인격’으로 성사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JP가 옳았다”

김재춘 전 부장은 5·16 이후 육군방첩부대장 겸 군검경(軍檢警)합동수사본부장, 국가재건최고회의 문교사회위원장 등을 지냈다. 이 기간 중 그는 김종필(JP) 중앙정보부장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1963년 민정(民政)이양을 앞두고 소장(少將)으로 예편한 그는 같은 해 2월, 제3대 중앙정보부장이 되었다. 중앙정보부장이 된 그는 공화당의 사전조직 문제 등을 둘러싸고 잡음이 일자, 공화당을 대신할 새로운 ‘범(汎)국민정당’을 만들어보라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지시에 따라 자유민주당을 만들었다.

하지만 자유민주당과 공화당을 저울질하던 박정희 의장이 결국 공화당을 선택함에 따라, 그는 1963년 7월 중앙정보부장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그는 무임소장관·자민당 최고위원을 잠깐 지낸 후 반(半)강제적인 외유(外遊)를 떠나야 했다. 한동안 정계를 떠나있던 그는 1971년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복귀했고, 이후 공화당 공천으로 제9대·1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하지만 5·16 군정(軍政) 당시와 같은 권력 핵심으로 복귀하지는 못했다. 19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통일민주당에 입당, 한때 YS진영에 합류하기도 했지만, 곧 결별했다.

5·16 군정 당시와 민정 이양을 전후한 시기에 JP와 맞섰던 자신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 김 전 부장은 “비밀리에 공화당을 만든 JP의 행태가 원대(原隊)복귀를 선언한 혁명 공약 제6항에 반(反)한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박정희 시대가 이미 오래 전에 끝나고 자신의 나이도 70대 중반에 접어들었기 때문일까. JP에 대한 그의 평가는 상당히 후해져 있었다. 그는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해서라도 민정에 참여, 당초 5·16혁명이 지향했던 조국근대화를 책임지고 마무리하려 했던 박정희 대통령과 JP의 판단이 옳았다고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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