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그룹 '슈퍼주니어'의 메인 보컬 규현(26)은 욕과 함께 뮤지컬에 데뷔했다. 2010년 규현이 '삼총사'에 달타냥으로 출연한다는 소식에 뮤지컬 팬들은 뜨악했다.

"쟤 누구야? 슈퍼주니어? 뭐 저런 애가 뮤지컬에 들어오냐." 아이돌 출신 배우가 흔하지 않던 때였다. "뮤지컬 팬 중 95%가 저를 욕했어요. 나머지 5%는 무관심이었고요. 전 인터넷에 올라온 욕을 일부러 다 읽어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확인하고, 팬카페에 들어가서 '사랑해주는 사람도 있다'는 위안을 얻어요. 욕 중에 일리 있는 부분은 연기에 반영해요. '보다 보니 괜찮더라'하는 글이 올라올 때까지 바꿔가는 맛, 뮤지컬이 주는 재미에요."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연습실에서 만난 규현은“뮤지컬 '해를 품은 달'의 주인공 이훤을 연습하며 한 뼘 자란 느낌”이라고 말했다. 데뷔작 '삼총사'의 달타냥(①),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프랭크(②)에 이어 그의 세 번째 도전이다.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주연 영화를 옮긴 '캐치 미 이프 유 캔'(2012)에 이어 '해를 품은 달'(이하 '해품달')에서 주인공 이훤 역을 맡은 규현을 최근 서울 종로구 연습실에서 만났다. 아이돌 한두 명 안 나오는 대작 뮤지컬을 찾아보기 어려운 요즘, 규현은 드물게 '되는' 아이돌이다. 일부 아이돌이 과대 포장된 마케팅 도구로만 쓰이는 것과 달리, 공연을 보는 재미를 준다.

그의 '캐치 미 이프 유 캔' 첫 공연을 봤다는 기자의 말에 규현은 "어휴, 그걸 보셨다니. 정말 더럽게 못 했는데"라고 정색을 했다. 아주 잘한 공연은 아니었다. 마지막 독창 '굿바이'를 부를 때는 공연장이 일순 규현 콘서트장이 됐다. 자신을 지우고 배역이 돼야 하는 배우로서는 낙제였다. 그러나 단독으로 대극장 무대를 끌고 가는 재능만은 어떤 아이돌보다 돋보였다.

데뷔작 '삼총사' 첫 연습 때 욕 세례가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 원래 달타냥 역은 규현을 '콕 집어' 들어온 제안이 아니었다. '슈퍼주니어'이기만 하면 됐다. 그 기회를 덥석 잡았다. "가수로서 더 보여줄 게 없던 때였어요. 제 끼를 보여줄 기회가 왔다고 생각해서 올인했죠."

나름대로는 '올인'이었으나, 걸음걸이부터 말투까지 되는 게 없었다. 부친의 묘비를 보며 "총사가 되겠다"고 다짐하는 첫 장면. "복받치는 감정을 보여주라"는 연출가 왕용범의 주문을 받았지만, 왜 복받쳐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던 그는 주뼛거리다 2시간을 헤맸다. 참다못한 왕용범은 앙상블(여러 단역을 돌아가며 소화하는 배우) 30명한테 지시했다. "일제히 규현이한테 욕을 해." 사방에서 날아온 날 선 말을 1시간 가까이 듣다 보니 눈물이 났다. 규현은 "완전히 한 꺼풀 벗은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욕먹고 큰 그는 "아이돌은 욕 좀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마땅히 감수해야 할 부분이에요. 여느 배우들이 차근차근 밟아온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주역을 맡는 건 특혜니까요."

'해품달'은 규현의 첫 창작 뮤지컬이다. 짜인 대로 따라가는 라이선스 작품과 달리 끊임없이 고치고 보완한다. 매주 절반을 해외에서 지내는 아이돌의 '미친 스케줄' 탓에 연습에 참여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일부 배우가 그들을 백안시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규현은 "이번에는 무조건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연습장에 있으려고 한다"며 "평소 무대에서 외우는 주문을 더 자주 왼다"고 했다. 그의 주문이란 '저 많은 관객 중에 내 팬은 없다'는 것이다. "냉정한 뮤지컬 팬만 있는 자리에서 연기로 박수받고 싶어요." 그의 주문이 이뤄질지는 오는 18일 '해품달' 개막날 확인할 수 있다.

▷뮤지컬 '해를 품은 달' 18일~2월23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02)556-5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