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인 ‘신을 수 없는 하이힐’. 19×14㎝.

"검은 대지에 잔잔히 피어난 꽃들과 같다."

흑자(黑磁) 도예가 청곡(淸谷) 김시영(56)의 작품을 놓고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이렇게 평했다. 검은빛 안에 오묘함을 머금은 흑자는 중국과 일본에서는 계속 발전하며 '가장 아름다운 도자기'라는 평가를 받지만 국내에선 고려 이후 사실상 맥이 끊겼다.학자 중에는 "근대 이후 서구의 도자기가 유입되면서 쇠퇴했다"는 시각이 있고, 한쪽에선 "통일신라 말 청자 가마에서 제작되다가 고려를 거쳐 조선으로 들어서며 차츰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김시영은 잊혀가던 흑유도기(黑釉陶器)의 전통을 잇는 국내 유일의 흑자도예가. 원래는 공학도였다. 연세대 금속공학과에 입학한 그는 대학 산악부 동아리에 들어가 태백산맥을 종주하다가 우연히 화전민 터에서 검은 도자 파편을 발견했다. "검은빛의 깊은 매력에 호기심을 품었지요. 졸업 후 대기업에 들어갔지만 검은 도자기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결국 회사를 그만뒀다. 김씨는 고향인 가평에 가마를 짓고 흑자 연구에 투신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 따라 흙을 채취하러 이 산 저 산을 누볐다"는 두 딸 자인(28·이화여대 조소과 졸업)씨와 경인(24·서울대 조소과 재학)씨도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다.

세 부녀의 도자기 작품이 나란히 전시장에 나왔다. 5일부터 17일까지 서울 을지로 롯데갤러리에서 열리는 '흑유명가 가평요-검은 달항아리와 그 이후'전(展). 중후한 빛깔을 뿜어내는 아버지의 검은 달항아리, 큰딸의 세련된 하이힐 모양 도자기, 작은딸의 앙증맞은 사과 모양 도자기 등 70여점을 만날 수 있다. (02)726-4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