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작가 줄리언 오피(56·아래 사진)가 바지 뒷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직접 한국에서 찍은 영상을 기자에게 틀어줬다. 택시 미터기가 돌아가는 장면이었다. "여기 조랑말 보이죠? 1990년대 초 한국 왔을 때 김포공항에서 택시를 탔는데 이 말(馬)이 심장에 콕 박혔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작고, 쉴 새 없이 달리는 조랑말! 얼마나 로맨틱하고 경이로운가요. 이게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한, 움직이는 사람을 다룬 제 LED 작품의 원천이었습니다."

13일 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개인전 참석차 한국을 찾은 오피는 휴대전화를 수시로 꺼내 자신이 한국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보여줬다. 서울역 근처 한 빌딩에서 건졌다는 화장실 픽토그램(공공장소에 쓰이는 사인)은 식수대에서 물을 먹고 있는 사람 형상이었다.

이번 전시엔 한국 사람들을 소재로 한 작품을 내놓았다. 제목은 아예 '신사동' '사당동'이다. 한국 사진가에게 서울 도심의 오피스가, 쇼핑가, 주택가를 두루 찍게 하고 그중 마음에 드는 장소로 고른 곳이 두 동네였다. 사진을 바탕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이 지역에 가봤느냐고 묻자 오피는 의외로 "노"라고 했다. "일부러 가보고 싶지 않다. 사람들은 어디든 다르지 않다"고도 했다.

서울 사당동에서 찍은 사진을 토대로 만든 줄리언 오피의 2013년 작 ‘사당동’. 비오는 날 우산을 들고 분주히 오가는 한국 사람을 표현했다.

"신사동, 사당동이라는 두 장소 자체가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닙니다. 쇼핑백을 들고 여유롭게 움직이는 모습, 독특한 패션 조합, 사람들의 응집(cohesion)이 흥미로웠어요. 그걸 하나의 타입으로 형상화해 담았을 뿐입니다. 작품을 통해 어떤 메시지나 지역성을 전달하고 싶진 않아요."

그렇다면 단지 한국 흥행을 위한 "관람객 맞춤형(customization) 작품" 아닌가. "관람객 맞춤형은 맞습니다. 다만 흥행을 위한 게 아니라, 작품과 관람객 사이의 공통 언어(common language)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한국 관객이 와서 그들을 다룬 그림을 보면 자연스레 내 그림과 소통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작업 방식이 전달되는 거죠."

줄리언 오피.

오피의 작품은 한없이 단조로워 보이면서도 깊은 움직임(movement)이 있다. 군중을 그린 작품에선 사람 얼굴에 눈, 코, 입이 없다. 대신 걷는 움직임이 있다. "작품에 너무 많은 정보를 담으면 관람객이 뒷걸음칩니다. 그래서 '단순화'하는 거죠. '움직임'은 내러티브를 만들어 관객이 지루함을 느끼지 않게 합니다."

군중을 그리는 오피는 아이로니컬하게 "군중을 벗어나 있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했다. 군중을 서울 도심에 걸어놓은 작가는 다음 날이면 '군중을 떠나' 딸 셋, 아들 하나, 그리고 아내와 몰디브에서 휴가를 즐길 거라며 해맑게 웃었다. 전시 3월 23일까지. (02)735-8449

☞줄리언 오피

런던 출신의 작가. 런던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공부했다. 1990년대부터 인물 형상을 공공장소의 사인처럼 단순한 선으로 표현한 작품을 만들어 왔다. 서울역 앞 서울스퀘어에 걸린 대형미디어 작품 ‘군중(Crowd)’으로 한국에서도 익숙한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