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간정에서 낮잠을 자다

금강산 담무갈 보살이 그대라면
대궐의 뛰어난 신하는 나 아니겠나?
그대와의 만남이 한참 늦었으나
서로의 처지 잊고 절로 친해졌네.
세상에 매인 몸이니 잠깐 떨어졌다가
늙은 뒤에 호젓하게 다시 만나세.
높다란 정자에서 낮잠을 깨고 보니
일만 봉우리 하늘 끝에 푸르구나.


淸磵亭晝睡

楓岳曇無竭(풍악담무갈)
金門老歲星(금문노세성)
相逢雖恨晩(상봉수한만)
交契自忘形(교계자망형)
暫別緣塵累(잠별연진루)
幽期屬暮齡(유기속모령)
高亭殘午夢(고정잔오몽)
天外萬峯靑(천외만봉청)

1603년 가을 교산(蛟山) 허균(許筠·1569~1618)이 조정에서 쫓겨났다. 할 일이 없어지자 금강산을 두루 여행하고 외가가 있는 강릉으로 향했다. 그 길에 고성 청간정에 올라 낮잠을 실컷 자고 일어나 꿈속의 일을 시로 썼다. 꿈에서 그는 금강산 산신령 담무갈 보살을 만났다. 그는 대뜸 "나는 임금님을 모시던 능력 있는 신하다"며 친구 하자고 손을 내밀고 즐겁게 노닐었다. 그리고 세상에 매인 몸이라 산을 내려가니 늙어서 돌아올 그날을 기다리라고 하직 인사를 했다. 꿈에서 깬 그의 눈앞에는 금강산 일만이천 봉우리가 푸른빛을 띠고 서 있다. 명산을 겪은 이에게 그곳을 떠나기란 정말 싫은가 보다. 꿈속일망정 신선이 되어 명산을 대하는 태도가 대범하고 자유분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