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인공호흡기를 달고 신촌세브란스병원에 누운 김 할머니 모습. 김 할머니는 경기도 과천에 4층 집을 짓고, 장성한 자식들과 한 층씩 나눠 쓰며 화목한 대가족으로 살다가 식물인간이 됐다.

어떤 병이 됐건 일단 환자가 중환자실에 들어가 연명 치료를 시작하면 중단하기 쉽지 않다. 아무리 회복 가능성이 낮아도, "더 이상 못 보겠다"고 사정해도 병원에선 "법에 걸린다"고 도리질한다. 2009년 국내 처음으로 대법원에서 '연명 의료 중단' 허락을 받아낸 김 할머니 유족도 꼬박 1년간 법정에서 병원 측과 치열한 법리 다툼을 벌여야 했다.

왜 이런 경직된 풍토가 만들어진 걸까? 전문가들은 "뿌리에 '보라매병원 사건'이 있다"고 했다.

대낮에 실려온 남자

서울대 출신 전문의가 어느 날 갑자기 '살인범'으로 몰렸다. 1997년 12월 4일 서울 보라매병원에서 벌어진 일이다. 독산동에 사는 58세 남성이 낮술에 취해 시멘트 바닥에 머리를 찧고 이 병원 응급실에 실려 왔다. 의료진이 보호자를 수소문하다 '일단 사람부터 살리자'며 9시간 동안 뇌수술을 했다. 환자 부인이 뒤늦게 연락받고 달려왔다. 인공호흡기 달고 있는 남편을 보더니 대뜸 "퇴원시켜 달라"고 했다. 수술비·입원비 등 260만원을 감당할 형편이 못된다는 이유였다.

"퇴원하면 죽는다"

담당 레지던트(당시 28세)가 "지금 퇴원하면 죽는다"고 말렸다. "정 돈이 없으면 차라리 1주일 정도 병원에 있다가 밤에 몰래 도망가라"고까지 했다. 부인은 막무가내였다. "남편이 17년간 무위도식하며 가족을 폭행하더니 이렇게 됐다"고 했다.

의료진이 졌다. 뇌수술을 집도한 신경외과 전문의(당시 33세)가 '병원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고 퇴원을 승낙했다. 입원한 지 36시간 만이었다. 인턴(당시 25세)이 앰뷸런스로 환자를 집까지 태워다주고 인공호흡기를 뗐다. 환자는 5분 만에 '꺽꺽' 소리를 내고 사망했다.

병사냐, 변사냐

사달이 난 건 그다음이다. 누군가가 부인에게 "가난한 변사자는 경찰서에서 일정액을 장례비로 보태주더라" 귀띔했다. 부인이 그 말을 믿고 서울 남부서에 남편이 죽었다고 신고했다. '병사'(病死)에서 '변사'(變死)로 사건의 성격이 변한 순간이었다.

경찰은 "유족이 장례식도 제대로 치르지 않고 서둘러 시신을 화장터에 보낸 점이 수상하다"고 봤다. 의사를 불러 "퇴원시키면 죽을 줄 알았느냐, 몰랐느냐" 물었다.

당시 대한의사협회 대변인을 맡았던 사람이 권용진 서울시립북부병원장이다. 권 원장이 "돌아보면 의료계는 법을 몰랐고, 법조계는 의료 현실을 몰랐다"고 했다. 의료계는 "본인과 가족이 원하면 빈사의 환자라도 퇴원시키는 게 관행"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검찰은 "죽을 줄 알면서도 퇴원시켰으면 살인"이라며 부인과 의료진을 기소했다.

7년 재판 끝에 2004년 6월 대법원이 유죄를 확정했다. 살인죄를 살인방조죄로 깎아주기는 했다. 부인·의사·레지던트·인턴 넷 중에서 앞의 셋은 유죄, 인턴은 '지시대로 따랐을 뿐'이라는 이유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나도 살인자로 몰릴 수 있다"

이 사건은 의료계에 엄청난 충격을 줬다. 중환자실 의사들 사이에 "나도 하루아침에 '살인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중압감이 번졌다. 환자가 원해도 치료를 중단하지 않는 것이 철칙이 됐다.

2009년 대법원에서 '연명 의료 중단' 허락을 받아낸 김 할머니 판결 이후에도 이런 풍토는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 무엇보다 아직도 '법'이 없다. 어디까지가 정상적인 치료이고 어디까지가 연명 치료인지, 어떤 경우 중단하고 어떤 경우 지속할지 명료하게 정한 기준과 절차가 없다. 지금도 전국적으로 1500여명이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연명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지금 그들은 뭐라고 할까

보라매병원 사건 당시 유죄판결을 받은 의사는 현재 이 병원 교수로 일하며, 매주 2회 외래 환자를 보고 있다. 인터뷰를 청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그를 아는 의료계 인사가 "정신적 충격이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무죄판결을 받은 인턴이 강문철(43) 서울 원자력병원 흉부외과 과장이다. 그는 "보라매사건 환자는 의학적으로 볼 때 '살아날 수 없어서 퇴원시킨 사람'(hopeless discharge)이었다"면서 "병원이 아니라 집에서 마지막을 맞고 싶어하는 환자들도 있는데, 그 사건 이후 사실상 그런 퇴원이 불가능해졌다"고 했다.

최선의 마무리

1심 유죄판결을 내렸던 권진웅 당시 서울지법 남부지원장. 이젠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그는 "보호자가 요구하면 퇴원시키는 게 그 시절 관행이었지만, 법의 관점에서 보면 의사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한 측면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관행이 그대로 가선 안 된다는 뜻에서" 유죄판결을 내렸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판결이 한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저희 어머니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셨을 때 당장 병원에서 '인공호흡기를 달 거냐, 말 거냐' 그것부터 물어보더군요. 의료진의 고민을 이해했습니다. 어머니요? 고령이고 회복 가능성이 없어 연명 치료는 하지 않았습니다."

[[투표하기] 말기 癌환자의 '인공호흡', 기계로라도 연명해야 vs. 무의미한 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