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전범(戰犯)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사진 가운데)이 체포되기 직전에 남긴 미공개 기록들을 바탕으로 독일 역사학자 베티나 스탕네트(Stangneth·48)가 펴낸 책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대량 학살자의 반성하지 않는 삶'이 최근 미국에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스탕네트의 책은 아이히만에 대한 선구적 저작으로 꼽혔던 한나 아렌트(1906~1975)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공박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아렌트는 유대인 학살의 실무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이 나치의 명령에 무비판적으로 복종했던 평범한 관료에 불과했다고 봤다. 반면 스탕네트는 아이히만이 적극적인 나치 동조자이자 '확신범(確信犯)'이었다고 주장한다. 뉴욕타임스는 "예전 연구자들이 아렌트의 연구에 흠집을 낸 정도였다면, 이번엔 산산조각을 내버렸다"고 평했다.

스탕네트는 아렌트가 1961년 공개 재판 당시 아이히만의 '연기'에 속은 것으로 봤다. 아이히만은 인종주의와 반(反)유대주의 같은 나치즘에 적극적으로 찬동했으며, 심지어 1945년 패전 이후에도 나치 지지자로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전후(戰後) 아르헨티나로 도피해서 1960년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체포될 때까지 이름을 바꾼 채 숨어 지냈다.

이 책에서 스탕네트가 주목한 건, 아이히만이 전후 아르헨티나에서 남긴 미공개 기록들이다. 1300쪽에 이르는 자필 기록과 녹취록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아르헨티나로 도주한 나치 전범이나 동조자들과 '독서 클럽'을 만들고 거의 매주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 아이히만은 "1000만여 명의 적(敵)이 죽었다면, 우리는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