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이토록 아름다울 수가…."

지난 1일, 일본 교토 고류지(廣隆寺) 경내에 나지막한 탄성이 울려 퍼졌다. 어두컴컴한 보물전 한가운데 오롯이 앉아있는 '목조미륵반가사유상' 앞에서다. 독일 실존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가 "지상의 시간과 속박을 넘어서 달관한 인간 실존의 가장 깨끗하고, 가장 원만하고, 가장 영원한 모습의 상징"이라고 예찬했던 일본 국보 1호였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30년 전 오직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을 보기 위해 교토를 찾았었노라" 고백했다. 우리 국보 제83호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쌍둥이처럼 닮아 일본미술사에서는 한반도에서 도래한 불상의 상징으로, 한국미술사에서는 사실상 삼국시대 불상의 하나로 여겨온 '명작'이다.

‘백제의 미소’를 그대로 보여주는 고류지의 목조미륵반가사유상(왼쪽). 일본 국보 1호였던 이 불상은 우리 국보 83호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쌍둥이처럼 닮았다.

'제34회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에 참여한 300명 한국 교사를 이끌고 이날 고류지를 찾은 정영호 단국대 명예교수가 이 불상에 얽힌 극적인 일화를 들려줬다. "불상의 미소, 그 자태에 반한 일본 대학생이 불상을 끌어안다 손가락을 하나 부러뜨렸지요. 국보 훼손이니 난리가 났는데, 어느 역사학자가 손가락이 부러질 때 떨어진 나뭇조각을 연구했더니 한반도에서만 자라는 적송(赤松)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겁니다. 일본 국보인 이 불상이 한반도에서 제작됐다는 유력한 근거가 됐지요."

'백제의 미소'는 일본 최초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나라의 호류지(法隆寺)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2m가 넘는 키에 아리따운 얼굴, 호리병을 가볍게 잡고 있는 손가락 등 백제 마애불상에서 흔히 발견되는 특징 때문에 아예 '백제관음'이란 이름이 붙은 불상이다. 홍의수 광명시 소하고 교사는 "그냥 맨눈으로 봐도 우리 불상이구나, 우리 유물이구나 하는 느낌에 가슴이 뭉클했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은 일본 고대문명 속에 새겨진 한국 문화의 흔적을 찾기 위한 취지로 1987년 첫걸음을 내디뎠다. 조선일보가 주최하고 신한은행과 포스코가 후원하는 행사로, 전국 초·중·고 교사들이 함께한다.

9월 29일에 시작한 이번 탐방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백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일본과 손잡은 백제 유민들이 산성을 쌓고 관청을 지었던 규슈지역 '다자이후(大宰府)'에서 출발했다. 구마모토현에 자리한 '후나야마 고분'에서 발굴된 5세기 금동신발과 금동관, 청동거울, 금귀고리 같은 부장품들은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과 흡사해 여기저기서 탄성이 쏟아졌다. 천황을 모신다는 '우사신궁'에서는 청동으로 만든 신라시대 범종을 만났다. 일본으로 건너간 여섯 점의 신라 종 중 하나라고 했다.

한반도의 고대 절 양식을 보여주는 시텐노지(四天王寺)에서 설명하는 정영호 교수.

임진왜란 후 화해무드를 조성하기 위해 조선통신사가 걸어간 뱃길을 따라 시모노세키를 거쳐 오사카항으로 배를 타고 가는 여정은 올해가 청일전쟁 발발 120주년이라 감회가 더욱 특별했다. 조선통신사들이 묵은 숙소였다는 시모노세키의 '아카마 신궁'과 청·일 양측이 조선의 운명을 놓고 협상했다는 요정 '슌판로(春帆樓)'를 둘러볼 때는 탐방단의 표정이 숙연해졌다. 손승철 강원대 교수는 "과거사 문제로 한·일 정상이 쳐다보지도 않는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미래를 같이 살아가야 할 공생의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을 조선통신사의 역사가 일깨운다"고 말했다.

부여를 똑 닮은 아스카 들판에는 가을이 완연했다. 백제 유민들이 건너가 일본 고대문명의 싹을 틔운 아스카에는 삼국의 굴식돌방무덤을 그대로 본뜬 이시부타이(石舞臺) 고분, 백제 왕흥사를 모델로 지은 아스카테라(飛鳥寺) 등 그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이경희 성수초등학교(성남) 교사는 "우리 역사의 흔적, 뿌리를 찾아가는 길이 이렇게 감동적일 줄 몰랐다"며 "한국에 돌아가는 대로 여기서 수집한 자료들을 토대로 역사 수업을 위한 지도안을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