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가죽 공장이 밀집한 서울 성수동 공장 지대에 있는 '플레이스 사이'. 330㎡(100평) 남짓한 허름한 지하 창고를 개조해 만든 공간 이곳저곳, 10여명의 젊은 예술가들이 보였다. 안무가 유호식(33)씨가 일본에서 온 안무가와 아이디어를 나누는 사이, 옆에선 미디어 작가 그룹 '팀보이드'가 벽면에 프로젝터를 쏴 몸짓에 따라 변하는 영상을 실험 중이다. 곁에선 작가 고지훈(29)씨가 벽화 작업에 한창이다. 다양한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던 앤디 워홀의 뉴욕 작업실 '팩토리'가 얼핏 떠올랐다.

이들은 미술, 영상, 사진, 디자인, 무용, 패션 등 서로 다른 문화 영역에서 활동하는 젊은 예술가들이 만든 커뮤니티 '사이(SAI)' 회원들. 다음 날 있을 한·일(韓·日) 무용 전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플레이스 사이'는 20여명이 월 회비 15만원을 내고 함께 쓰는 공간이다. 회원들은 각자 다른 예술 장르를 기반으로 독립적으로 일하지만, 프로젝트에 따라 자유롭게 팀을 꾸려 협업한다. 영역을 넘어 '따로 또 같이 하는 예술'. 요즘 20~30대 젊은 예술가들 사이에 새롭게 등장한 문화 코드다.

통섭 열풍, 예술을 두드리다

게임과 영상을 결합한 작업을 하는 작가 릭킴(35)씨는 지난 8월 예술, 디자인, 교육, 마케팅 분야까지 아우르는 문화·예술가들을 위한 커뮤니티 '프리키(FreeKey)'를 온라인상에 만들었다. 각자 활동하는 회원 33명이 혼자서는 할 수 없는 문화 프로젝트를 내고 사안에 따라 자유롭게 협업한다. 지난 10월부터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 미디어폴에서 하고 있는 영상 전시 '프로젝트 페이스 드로잉' 전이 이들의 결실이다. 미술가, 디자이너, 사진가로 활동하는 프리키 회원들이 각자의 장기(長技)를 공유해 만들어냈다.

서울 성수동 창고를 개조해 만든 문화 공간‘플레이스 사이’를 공유하는 젊은 예술가들. 이들은 미술, 디자인, 사진 등 다른 영역에서 각자 활동하지만 자유롭게 팀을 짜서 협업하기도 한다.

"'예술 품앗이'라고 보면 됩니다. 서로 재능을 나누면서 혼자서는 완결하기 어려운 예술 프로젝트를 원스톱으로 만들어 내는 거죠." '사이'를 창립한 김시온(32)씨는 이처럼 개별적으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온·오프라인에 플랫폼을 만들고 예술을 공유하는 움직임에 대해 "학문 간 영역을 넘나드는 통섭 트렌드가 예술문화계로도 확산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릭킴씨는 "실용적이고, 좀 더 일반인들의 삶 속에 파고들어갈 수 있는 예술을 하기 위해 마케팅 전문가, 기술자까지 결합한 커뮤니티 모델을 만들어봤다"고 했다.

문화, 예술 등 분야를 넘나드는 예술가들의 교류 자체가 처음 있는 현상은 아니다. 김시온씨는 "과거 문화 살롱이 '친목' 행위에 가까웠다면 우리는 새로운 문화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기반이라는 점에서 다르다"고 차이점을 설명한다.

'88만원 세대' 예술가가 사는 방식

"요즘은 작가들도 홍보, 마케팅이 중요한데 경제적 여유가 없는 젊은 작가가 혼자 해내기란 불가능해요. 여기선 사진가가 프로필을 만들어주고, 디자이너가 웹사이트를 만들어주죠. 반대로 사진 작업하는 분이 배경이 필요하면 제가 벽화를 그려주는 거죠." '사이' 회원인 작가 고지훈(29)씨 얘기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카페 겸 신세대 예술가들의 문화 플랫폼인 '아트씨 컴퍼니'를 운영하는 설치 작가 백인교(31)씨는 "기성 문법으로 짜인 문화계에서 젊은 작가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거의 없다"며 "살기 위해 새로운 예술을 만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대안 문화 전문가인 안무가 한창호씨는 "예술의 주 소비자인 젊은 관객이 과거와는 달라졌다. IT 세대인 이들은 특정 장르의 예술보다는 여러 장르를 결합한 다원 예술에 더 호응한다"며 타 영역을 아우르는 문화 플랫폼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