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11년 금융기관의 부도덕성에 반기를 들며 월가를 휩쓴 점령 시위(Occupy Wall Street)가 종반을 향할 때다. 구호를 외치던 시위대가 사라진 자리에 이제 막 걸음마 뗀 아이만 한 로봇이 등장했다. 어설프게 넥타이를 둘러맨 이 로봇의 이름은 'Management-bot(관리자 로봇)'. 시위 피켓을 아래위로 흔드는 'Occu-bot(점령 로봇)'이 곁을 지켰다. "관리자는 관리를 위한 관리를 한다"는 조롱 섞인 메시지를 담은 로봇들은 저항의 열기가 사그라진 뒤 다시 냉랭한 무관심의 세계로 도망친 월가 사람들을 비틀어댔다.

행인의 사진을 찍어 엉덩이로 배설하는‘로봇 오리’. 오른쪽은 월가 시위 때 만든 로봇들.

#2. 발엔 로봇 청소기, 엉덩이엔 디지털 프린터, 눈엔 카메라가 달린 우스꽝스러운 '오리 로봇'이 행인들에게 다가간다. 오리 로봇은 자기 모습을 찍는 사람을 찍어 즉석에서 디지털 프린트해 엉덩이로 배설한다. 불필요한 이미지를 과잉 생산하는 이 시대를 향한 오리의 깜찍한 반항이다. 작품명 '이미지를 소화하는 오리(Image Digesting Duck).

기술자가 보면 코웃음 칠 초보적 기술과 의도한 어설픔이 빚은 이 로봇은 과연 기술일까, 예술일까. "그 질문이 생기는 것만으로도 제가 의도한 예술은 성공했네요. 기술과 예술의 경계를 모호하게 해 '이것도 예술이야?' 묻게 하는 것, 그 시도를 하고 싶거든요." 이 얼렁뚱땅 로봇의 아빠인 작가 최태윤(33)이 해맑게 웃는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최씨는 전통적인 잣대로는 예술가의 영역으로 볼 수 없는 작업들을 한다. 시카고예술대학에서 미술을, KAIST에서 문화·기술을 공부한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예술과 기술을 접목한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시각적으로는 허접해 보이지만 컴퓨터의 기본 원리인 이진법을 담은 '수공 컴퓨터'를 만들고, 뉴욕대(NYU)에선 미디어 기술을 가르친다. 2013년엔 뉴욕에 시적 연산 학교(School for Poetic Computation)라는 대안 학교도 공동 창립했다. 이름마저 참으로 모호한 이 학교는 컴퓨터 기술, 영상 만드는 법 등을 가르친다.

'기술' '예술' '교육'을 넘나드는 이 엉뚱한 청년 작가의 행보에 국내외 미술계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는 기획전 '사물학II: 제작자들의 도시'에선 그의 '수공 컴퓨터'가 전시됐고, 서울 창성동 갤러리 팩토리에선 그가 기획한 '당신의 친구'전이 펼쳐지고 있다. 미국 LACMA(LA카운티미술관)의 '아트+테크놀러지 프로젝트' 작가로 선정돼 7월 이 미술관에서 전시한다.

“과학 상자 같다고요?”손수 제작한‘수공 컴퓨터’를 들고 있는 작가 최태윤. 그는“컴퓨터는 반복과 은유의 집적체로 어쩌면 그 어떤 예술보다도 시적인 것 같다”고 했다.

아직은 설익은 그의 작업에 주목하는 이유는 새로운 예술 환경에 처한 젊은 작가들의 작업 방식을 단면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대표작 수공 컴퓨터는 디지털 기기라기보다는 초간단 회로와 나무로 뚝딱 만든 '공예품'에 가깝다. 작가는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내 몸의 일부처럼 됐는데 그 작동 원리를 모르는 게 모순이란 생각이 들더라. 작동 원리를 알아서 내가 100% 운영할 수 있는 컴퓨터는 어떤 건지 궁금해 시작해 봤다"고 했다. 기술이 추상화된 상품으로 만들어지고, 인간은 그 기술 상품의 '운반자'로 전락한 상황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려 의도적으로 허술한 컴퓨터를 만들었다.

작가는 이 과정을 자신의 '예술 운동' 방식이고, 이 운동의 핵심이 '교육'이라 했다. "2011년 월가 시위 이후 뉴욕에선 정규 시스템에서 할 수 없는 예술 교육을 위한 학교가 많이 생겨났어요. 저도 새로운 예술을 위해 교육 실험을 지속해 나갈 겁니다." "우스운(funny) 예술이 아닌 우스꽝스러운(silly) 예술로 세상을 풍자하고 싶다"는 작가의 결코 우습지 않은 포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