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사재판 '감정(鑑定)' 과정에서 뒷돈이 오간 사실이 검찰 수사로 드러났다.

부산지검 특수부(부장 김형근)는 26일 공사 대금 관련 소송의 법원 감정인으로 활동하면서 소송 당사자들로부터 1930만원을 받은 혐의로 기술사 김모(54)씨를 구속 기소했다. 검찰은 법원이 김씨에게 의뢰한 감정을 감정인 자격도 없는 기술사들에게 '하도급' 준 혐의로 김씨가 소속된 법인 대표 이모(56)씨도 구속 기소하고, 관련자 6명은 불구속 기소했다.

손해배상 등 금전 문제를 다루는 민사재판에서 주로 이뤄지는 감정은 전문 지식이 부족한 법관이 해당 분야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한 제도다. 특히 공사 대금 문제 분쟁이 잦은 건설 분야, 의료 사고 재판에선 '재판 결과의 7, 8할은 감정이 좌우한다'고 할 정도다.

기술사 김씨의 비리도 공사 대금 분쟁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지난 3월 경남 거제의 모텔 신축 공사 대금을 놓고 건축업자와 건축주가 소송을 벌였다. 검찰에 따르면 법원에서 감정인으로 선정된 김씨는 건축업자와 건축주 양쪽 모두에게 '유리하게 감정해 주겠다'고 은밀한 제안을 했다. '감정의 힘'을 아는 양쪽 모두 각각 1080만원과 850만원을 김씨에게 건넸다고 한다. 김씨 회사 대표 이씨는 김씨가 맡아야 할 감정을 다른 기술사들에게 '하도급'을 준 뒤, 법원에는 김씨 이름으로 감정서를 제출했다. 검찰은 "이런 식의 감정 하도급 거래를 통해 통상 감정 비용의 10%가량을 수수료로 챙긴다"고 했다. 이씨는 퇴사한 직원이 법원 감정인으로 선정되자, 그 직원 몰래 감정을 진행한 뒤 명의를 도용해 법원에 내기도 했다고 한다.

법원 감정을 둘러싼 비리가 있다는 건 그동안 법조계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러나 수사기관이나 법원이 적발해내기 쉽지 않다. 은밀하게 이뤄지기 때문이다. 기술사 김씨처럼 감정인이 대놓고 뒷돈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사건 당사자들이 필사적으로 감정인들에게 접근하려고 노력하는 경우도 있다. 법원장 출신 변호사는 "의뢰인에게 '감정인에게 접근하면 안 된다'고 말해도, 어떻게든 감정인을 구워삶아 보려는 의뢰인들이 적지 않다"며 "큰돈이 걸린 재판에선 더 치열하다"고 했다.

감정인은 법원이 관련 협회 등의 추천을 받아 지정한다. 법원은 매년 설문 조사 등을 통해 감정인 가운데 부적격자를 걸러내 '감정 오염(汚染)' 차단에 노력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서울중앙지법의 경우 지난해 감정인 1657명 가운데 1106명만 재지정됐고, 551명이 바뀌었다. 그만큼 문제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 감정(鑑定)
건설·의료·소프트웨어처럼 전문 지식이 필요한 재판에서 법관이 해당 분야 전문가에게 특정 사안에 대한 구체적 사실 판단을 의뢰하는 증거조사 방법. 법관이 결론을 내리는 데 중요한 참고 자료로 활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