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재은의 일상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눈 때문에 한동안 못 찍은 드라마 야외 촬영 분량을 요 며칠간 몰아서 찍고 있기 때문이다. 늦은 밤, 새벽에 퇴근하는 일이 빈번하지만 마음만은 즐겁다.

“좀 바빠도 연기 고민을 많이 하면서 사니까 기분 좋아요. 전에는 너무 바빠서 좀 쉬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지금은 일의 소중함을 느끼고 있다고 할까요? 일하는 게 이렇게 즐거웠구나, 새삼 느끼면서 하고 있어요.”

지난 1월 4일 방영을 시작한 일일드라마 에서 이재은은 발랄한 ‘돌싱’(돌아온 싱글의 줄임말) 오영심 역을 맡았다. 극 중 연하의 남자와 애정전선을 형성하는데, 극에 활기를 불어넣을 이 커플의 열연이 벌써부터 심상치 않다.

“저희 신랑은 오영심이 ‘잔푼이’ 같다고 그래요. 잔머리 쓰는 푼수데기를 줄인 말이라나요?(웃음) 오영심은 겉으로는 똑똑하고 똑 부러지는데 뭔가 2% 부족한, 성격도 급하고 오지랖도 넓은 철없는 돌싱이에요. 본인은 쿨하다고 생각하지만 주변에서는 덜렁이인 오영심을 되레 걱정스러워하죠.”

의외로 오영심은 그동안 그녀가 맡았던 배역 중 가장 젊고 밝은 축에 속한다.

“그간 암울한 캐릭터나 나이 든 역할을 많이 했어요. 제 나이에 맞는 역할이라기보단 캐릭터 강한 역할이 많았죠. (2011) 때는 80세를 연기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오영심은) 지금까지와는 많이 다른 캐릭터예요. 어떻게 보면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역할이죠. 제가 스무 살 때 찍은, 당시 한창 인기 많았던 (2002) 때의 느낌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연하와의 로맨스 역시 낯설지만 기분 좋은 경험이다. 제작발표회에서 언급했듯이 “그간 만난 파트너 중 톱3 안에 들” 정도라고.

“그동안 제가 파트너 복이 없었어요. 사극에서도 내시랑 바람나는 세자빈이었고, 유부남 내지는 삼촌뻘이 많았죠. 연상연하는 처음이에요. 파트너로 호흡을 맞추게 된 (설)정환이가 신인인데 엄청 긴장을 많이 해요. 너무 완벽하려고 하지 말고 놀듯이 하라고 얘기해주고 있어요.”

전에는 늘 현장의 막내였는데, 이제는 누군가에게 선배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 새삼 어색하기도 했단다.

“주인공으로 나오는 (양)진성이가 저를 ‘대장님’이라고 불러요. 왜 그렇게 부르느냐고 했더니 ‘선생님이라고 하기엔 젊고 선배님이라고 하기엔 거리감이 드니까 대장님이 좋지 않을까요?’ 하더라고요.(웃음) 선배가 되니까 되게 이상해요. 새삼 세월이 흘렀구나 싶죠. 무엇보다 막내일 때는 실수를 해도 용서가 됐다면, 지금은 선배니까 실수를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남편의 내조는 ‘아침밥 굶기’

그녀는 촬영을 앞둔 전날 밤, “설레기보다 긴장이 많이 됐다”고 털어놓았다. 촬영 시스템은 물론 감독과 작가까지, 그녀를 제외한 모든 게 다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세상은 많이 변해 있었다.

“감독님들이 세대교체가 많이 됐어요. 그러다 보니 저를 어려워하는 감독님들도 많은 것 같아요. 나이는 젊은데 경력은 너무 길고, 연기력은 보장하지만 커뮤니케이션하는 데 걸림돌이 있진 않을까 지레 겁먹으셔서 캐스팅을 안 해주시는 분들이 많으신 듯해요. 그러다 보니 TV 쪽으로 출연할 기회가 적었죠.”

금 작품의 감독 역시 비슷한 걱정을 했다고 한다. 연기력만큼이나 다른 배우들과의 친화력, 감독과의 유연한 소통 등은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걱정이 기우라는 걸 증명하는 건 그녀의 몫이다.

“지금 촬영이 이루어지는 SBS 탄현 세트장을 7~8년 만에 와요. 설레기도 하지만 첫 녹화 때는 긴장을 많이 했죠. 저에 대한 기대치가 있을 테니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컸거든요. 이렇게 얘기하면 제가 되게 옛날 사람 같은데(웃음) 전에는 비디오테이프로 녹화를 했기 때문에 편집점을 고려해 연기해야 했어요. 그때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새로운 시스템에 빨리 적응하려고 노력 중이에요.”

이런 이재은의 곁에는 누구보다 디테일하게 모니터링과 지적을 아끼지 않는 남편, 이경수 씨가 있다. 알려졌다시피 그는 실력 있는 안무가(전 울산시립무용단 상임안무자)이기도 하다.

“저희 신랑이 너무 세세하게 모니터링을 해서 피곤하다 못해 스트레스를 받을 지경이에요.(웃음) 저 옷 색깔은 너한테 안 어울리네, 입술 색깔은 왜 저런 걸 발랐느냐, 라면을 먹고 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부어 보이게 나왔느냐 등. 처음에는 알겠다고 했는데 하도 많이 얘기하니까 이제 그만 좀 하라고 해요. 그럼 또 서운하다고 삐치죠.”(웃음)

의외로 애교 없고 무뚝뚝한 성격의 이재은과 달리, 남편은 세심하고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옷 주름 하나까지도 세세하게 보는 편이에요. 군무를 짜는 사람이라 그런지 흐트러지는 것에 대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편이죠. 그래서 잔소리라고 들으면서도 흘려듣지는 않아요. 누구보다 세심하게 짚어준다는 걸 아니까요. 저희 신랑이 좀 특이한 건가요?”(웃음)

그런 남편은 현장에 복귀한 아내를 위해 아침밥을 지어주진 못해도 ‘아침밥을 거르는’ 내조를 하고 있단다.

“남편이 아침밥을 꼭 먹어야 하는 스타일이에요. 안 챙겨주면 위 아프다며 입이 이따만큼 나오거든요. 근데 요즘은 제가 새벽까지 촬영하고 늦게 들어와서 피곤하니까 아침밥을 거르고 나가요. ‘나 오늘부터 다이어트야!’ 이러면서 시리얼이랑 우유를 잔뜩 사 왔더라고요. 아침에 알아서 먹고 나갈 테니까 잠 더 자라고요. 그런 정도의 내조?”(웃음)

“도화지 같은 배우 되고 싶다”

아역배우로 데뷔,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활발하게 활동하던 그녀는 2006년 결혼과 동시에 연예계에서 멀어졌다. 배우가 아닌 한 남자의 아내로서, 평범한 주부로서의 삶을 택한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너무 오랜 시간 쉬지 않고 연기했어요. 그러다 보니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죠. 결혼한 뒤에 신랑에게 ‘나 2~3년만 아무것도 안 하고 쉬고 싶다’고 했더니 그러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몸도 좀 후덕해지고, 저를 너무 방치했던 것 같아요.”(웃음)

이 무렵 아버지까지 세상을 떠나면서, 제자리를 찾기까지 예상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결혼하고 한 달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집안의 대소사들이 얽히고설키면서 힘든 시기를 보냈는데, 그러다 보니 자신감도 없어지고 자존감도 많이 떨어졌어요. 그렇게 2~3년 방황하다가 어느 날 문득 이렇게 놀고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너무 오래 쉬었구나, 배우니까 뭘 하든 연기를 놓고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연극을 시작했죠.”

그중 하나가 현대 여성의 우울증과 소외감을 그린 연극 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명의 배우가 극 전체를 소화하는 일인극(모노드라마)으로, 연기력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하기 힘든 작품이다.

“자기 자신을 시험하는 무대에 서고 싶다는 생각은 배우라면 누구나 갖고 있지 않을까요? 진정한 배우로 거듭나기 위한, 배우로서의 욕심이죠. 그래서 (한계를 시험하는) 실험극 같은 연극무대에 올랐어요. 이걸 해낸다면 다른 어떤 작품이 들어와도 겁나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장르를 가리지 않고 도전했어요.”

하지만 언론은 그녀의 열정이나 연기보다 그 외의 것에 더 주목했다. 작년 6월 가상 이혼을 다룬 한 모큐멘터리가 방영됐을 때 역시 프로그램의 본질보다는 ‘이혼’에만 방점이 찍혔다.

“그 방송이 나가고 전화를 엄청 많이 받았어요. 놀란 시어머니한테 전화가 와서는 너네 무슨 문제 있느냐고 하시더라고요. 동네 사람들이 이상한 얘기를 한다고요. 기사에도 타이틀이 세게 걸려서 나가니까 더 걱정하신 것 같아요. 생전 전화 한번 안 하던 선배님들이 전화하셔서는 괜찮으냐고 묻기도 하시고요.”

어찌나 곤혹스러웠는지, 작년 말 에 출연할 때도 “꼭 해명을 해달라”고 남편이 신신당부했단다.

“저야 연락이 오면 (부부 사이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고 해명하면 되는데, 신랑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죠. 나쁜 놈처럼 비쳐지는 바람에요. 신랑은 일반인이고 단체장을 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소문이 안 좋게 나면 여러모로 피해가 크거든요.”

그래도 위기를 기회 삼아 본격적인 운동에 돌입했다고. 마침 작품 섭외까지 들어오면서 감량에 피치를 올렸다.

“제작진 측에서도 좀 더 뺄 수 있을까, 하는 요청이 있어서 최대한 노력을 했어요. 피부는 원래 스킨, 로션도 안 바를 정도로 관리를 안 했어요. 근데 이번 작품 하면서 관리의 중요성을 느껴요. 좀만 밤새우고 촬영하면 금세 주름지고 건조해지더라고요. 새삼 ‘나도 나이를 먹었구나’ 싶죠.”

오랜 연기 생활에 비해 아직 30대 중반, 어쩌면 그녀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다. 40대 배우들이 제2의 전성기를 맞는 요즘, 배우로서 이재은의 목표는 무엇일까.

“배우는 도화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떤 색깔을 입혀도 어울리는 사람. 고두심 선생님이나 메릴 스트립 같은 배우처럼요. 더 많이 내공을 쌓아서 그런 도화지 같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 더 많은 기사는 여성조선 2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