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 경기도 시흥시의 한 상조회사에 80대 노신사가 찾아왔다. 서울의 한 대학 교수 출신인 이 노신사는 "암(癌)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평소에도 검소하게 살았고, 허례허식에 돈을 쓰기 싫으니 최대한 간소하게 장례를 치르고 싶다"고 했다. 그는 상조회사와 협의해 자신의 장례 방법을 담은 '장례계획서'를 작성했다. 가족들은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겠다"는 노인의 뜻을 존중했다. 작년 12월 말, 장남이 장례계획서를 갖고 상조회사를 찾아 아버지의 죽음을 알렸다. 생전(生前) 작성해둔 장례계획서에 따라 빈소를 차리지 않았고, 시신은 화장(火葬) 후 공원에 뿌려졌다.

자신의 장례 준비를 자식들에게 맡기지 않고 본인이 직접 결정하는 '셀프(self) 장례'가 늘어나고 있다. 1000만~2000만원을 훌쩍 넘는 비싼 장례 비용을 자식들에게 부담시키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셀프 장례의 주된 수요층이다. 한국소비자원이 지난해 장례를 치른 63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상조업체에 장례를 맡겨 빈소를 차리고 3일장을 치르는 데 들어간 비용은 평균 1380만원이었다. 반면 셀프 장례 비용은 이보다 훨씬 적은 70만~300만원 수준이다. 빈소를 차리지 않는 데다 장례 기간도 1~2일로 짧기 때문이다. 또 매장보다는 화장이나 산골장(散骨葬·유분을 공원이나 바다 등에 뿌리는 방법)이 많은 것도 셀프 장례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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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비용을 미리 마련해두고 사전에 작성한 장례계획서와 함께 가족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아름라이프상조 신상경 대표는 "아직도 '빈소 없이 장례를 치르는 건 고인(故人)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라며 정식 장례를 고집하는 자식이 많다"면서 "이 때문에 셀프 장례를 원하는 노인분들이 자식들 몰래 찾아와서 계약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고령화 시대의 풍경인 고독사(孤獨死)에 대한 두려움도 셀프 장례가 늘어나는 이유 중 하나다. 서울 쌍문동에 사는 김평식(80)씨는 지난해 말 한 장례협동조합을 찾아 "내가 죽으면 내 계획대로 (장례를) 진행해 달라"고 부탁했다. 기초생활수급자인 김씨는 폐지를 주우며 사는 독거노인이다. 김씨는 "혼자 5~6군데를 돌아보고 장지(葬地)를 정했다"면서 "부고를 낼 필요도 없고, 빈소도 차리지 말아달라"고 말했다. 6·25전쟁 때 월남한 김모(여·85)씨는 지난해 말, 말기 암(癌) 진단을 받고 상조회사를 찾았다. 김씨는 "유일한 혈육인 여동생에게 부담을 주기 싫다"며 "'무(無)빈소 2일장'으로 장례를 치러달라"고 주문했다. 김씨의 장례계획서엔 '동생이 자주 찾아올 수 있도록 (동생이 사는) 서울 송파구에서 가까운 경기 용인시의 수목장에 묻어달라' '수의(壽衣) 대신 내가 아끼는 한복을 입은 채 묻히고 싶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김씨는 이 장례계획서와 장례 비용 잔금을 동생에게 맡겨 보관하고 있다.

일부 노인 복지관에서도 셀프 장례를 돕고 있다. 광주광역시 서구노인종합복지관은 지난 2013년부터 관내 독거노인 중 희망자에게 '장수노트'를 작성하게 하고 있다. 이 노트에 '자신이 죽으면 꼭 초대하고 싶은 사람', '장례 방식', '수의와 영정을 보관해 놓은 위치' 등을 적게 한다.

이 복지관의 박재형 과장은 "장수노트를 적다가 영정이 없는 분에겐 화장과 머리 손질까지 무료 봉사로 해주는 사진관을 소개해드리고 있다"면서 "처음 80여명으로 출발한 장수노트 작성자는 지금 800여명으로 늘었다"고 말했다. 이 복지관은 장수노트를 작성한 독거노인이 아무런 연고가 없을 경우, 미리 협약된 지역 장례식장 측에 고인의 뜻을 전해주고 무료로 장례를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서이종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독거노인이 많아지고 가족 간 유대도 점점 느슨해지는 한국에서 셀프 장례가 유행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며 "형식적 절차에 치우친 고(高)비용 장례 문화에 대한 거부감도 셀프 장례 확산의 원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