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영 주필

일본 공안조사청은 우리나라 국가정보원 역할을 맡는다. 공안조사청 조사2부장을 지냈던 사카이 다카시(坂井隆)씨가 아사히신문과 인터뷰를 했다(4월 26일). 퇴직 후 4년 만에 입을 연 것이다.

사카이씨는 국내에 그다지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 그는 30년간 북한을 담당했지만 자료 수집과 분석에만 열중했다. 언론 접촉이나 대외 활동은 삼갔다. 그의 마지막 직책은 우리 중앙 부처 국장급 자리다.

일본서 북한을 아는 척하면 국회의원이 되기도 한다. 아베는 북한에 단호한 입장을 취하며 총리직에 올랐다. 북한을 가장 잘 아는 사카이씨야말로 북한을 마케팅에 활용해 출세할 수 있었지만 그러질 않았다.

인터뷰를 읽으면서 그가 은퇴 4년 만에 등장한 이유를 짐작했다. "김정은이 엉망진창이고 변덕스러운 게 아니라 합리적 판단으로 국가를 운영하고 있다." 모험을 감행하는 폭주 열차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걸 알고 김정은을 상대해야 한다는 얘기다. 평생 한곳만 지켜본 전문가의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진심이 그대로 전달되는 기분이었다.

미국에는 사카이씨보다 더 지독한 인물이 있었다. 앤드루 마셜(Andrew Marshall)에 관한 책은 작년 1월 처음 출간됐다. 미국판은 '마지막 전사(The Last Warrior)'이고, 일본에선 '제국의 참모'라는 이름으로 출간됐다.

미국 정보계의 '요다'로 불렸던 앤드류 마샬

마셜은 영화 스타워즈에 등장하는 최고의 지도자인 '요다'로 불렸다. 42년 동안 8명의 대통령, 13명의 국방장관에게 미국의 안보 전략을 조언했다. 국방장관 직속 종합전력평가실(ONA) 실장으로 근무하며 장관에게 직보했다. 그는 1973년 그 자리를 맡은 이후 단 한 번도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승진도 하지 않았다. 항상 20명 이내 최고 두뇌들만으로 조직을 운영했다. 인터뷰도 하지 않고 세미나에 얼굴을 내밀지도 않았다. 일본에선 '전설의 전략가', 중국서는 '은둔의 제갈량'으로 통했다. 마셜의 공적은 비밀에 싸여 있다가 이제야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냉전 시대에는 소련이 군사력에 과잉 투자하도록 유도해 소련 붕괴를 재촉하는 전략을 세우도록 했다. 냉전이 무너진 뒤에는 이슬람 테러 세력의 등장을 예고했고, 일찌감치 중국이 미국의 다음 상대라고 보고했다.

작년 1월 은퇴했을 때 그의 나이는 93세였다. 우리로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가 한자리에서 42년 동안 국가에 헌신하는 동안 정권이 바뀌어도 국방장관들, 대통령들은 한결같이 그를 지켰다. 그저 예산을 지원하며 최상의 외교·안보 전략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마셜도 사카이씨처럼 대응 정책은 관료와 정치인들 판단에 맡겼다. 자신은 소련의 군사력, 중국의 전략을 분석하는 일에 몰두했다. 주적(主敵)을 알기 위해 역사와 지방 문화까지 연구했지만 자료 수집과 냉정한 분석에서 그칠 뿐이었다. 사카이씨는 이렇게 말했다. "정보 활동과 정책의 입안·집행은 분리해야 한다. 정보 활동도 수집과 분석을 한 사람이 맡으면 안 된다." 마셜도 똑같은 이유로 구체적인 정책 제시를 생략하곤 했다. 진단이 바르면 처방전은 쉽게 나온다고 믿은 것이다.

영국이 EU에서 탈퇴하자 문득 두 외골수가 떠올랐다. 독일·프랑스 등 대륙 세력은 똘똘 뭉쳐 영국에 까다로운 이혼 조건을 제시했다. 유럽판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의 균열이다.

일본 공안조사청에서 30여년간 북한 문제만 다뤄온 사카이 다카시(坂井隆)씨. 사진은 일본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 때 찍은 사진이다.

아시아에서는 몇 년 새 미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일본과 안보 동맹을 강화하자 대만엔 친미(親美) 정권이 등장했다. 미국은 필리핀·호주에 미군 기지를 새로 배치했고 그토록 싸웠던 베트남에도 무기를 팔기로 했다. 인도와는 원자력 협력을 강화하며 밀월 관계다.

우선 일본에 큰 점을 찍은 다음 대만에 찍어보라. 이어 필리핀·호주·베트남·태국·인도까지 점을 찍고 죽 선을 그어보면 중국의 목에 걸린 진주 목걸이가 그려질 것이다. 미국이 한·미·일 삼각(三角) 군사 협력을 강화하고 한반도 사드 배치에 집착하는 이유도 이 진주 목걸이를 완성하는 데 있는지 모른다.

브렉시트 결정 직후 시진핑 주석은 푸틴 대통령과 연이틀 회담을 가졌다. 두 사람은 한반도 사드 배치에 반대했다. 미국산 진주 목걸이에 질식당하지 않으려고 대륙 세력끼리 손을 굳게 잡은 꼴이다. 시진핑은 이어 황교안 총리에게 사드 배치에 신중해 줄 것을 강조했다. 그러고선 그동안 반대해오던 한국 총리의 중국 동북 지역 순방을 허용했다. 중국의 의도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 만하다.

대륙 파워와 해양 파워의 마찰은 유럽보다 아시아 쪽에서 훨씬 격렬하다. 여기서 우리가 판단을 그르치면 바둑알을 놓는 손이나 손가락이 되지 못하고 바둑알 신세가 될 수 있다. 나라가 바둑알이라는 피동체(被動體)가 되면 나라 운명은 고수들 손이 가는 대로 출렁이게 된다. '한국의 마셜'이 정말 아쉬운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