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장 행복해야 합니다. 나중에 행복하려고 지금을 희생하면 지금도, 나중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강원 평창 성 필립보 생태마을 관장 황창연(51) 신부는 '행복 전도사'다. 유튜브에 올라온 그의 강연은 조회 수 합계가 300만건을 넘을 정도. 그는 1년에 10만㎞씩 자동차를 몰고 다니며 300번씩 강연한다.

최근 신간 '삶 껴안기'(홍익출판사)를 펴낸 황 신부를 성 필립보 생태마을에서 만났다. '삶 껴안기'란 것도 실은 '행복 껴안기'와 같은 말이다. 그의 행복론은 비행기에서 안내하는 응급 상황 대처법과 닮았다. 자신이 먼저 산소마스크를 착용한 후 다른 사람을 도와주라는 것 말이다. 스스로 먼저 행복하지 않으면 남에게도 행복을 줄 수 없다는 것.

책엔 그의 조카가 죽을 뻔한 사연이 있다. 황 신부가 지원하는 아프리카 잠비아 현장에 동행했던 조카는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뻔했다. 겨우 생명을 건진 조카는 대학을 자퇴하고 뮤지컬학과에 새로 입학했다. "죽음 직전까지 가보니 제일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살고 싶다"면서. 95세 노인의 수기도 소개한다. 은퇴할 때까지는 자랑스럽게 살았는데 65세 이후로는 '보너스'로 생각하며 살다 보니 30년을 허무하게 보냈다며 95세부터 외국어를 배우려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다. '지금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일깨워주는 이야기들이다.

평창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성 필립보 생태마을엔 피정하러 오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생태마을 관장 황창연(오른쪽에서 넷째) 신부가 전북 군산에서 피정 온 학생들과 반갑게 만났다.

황 신부의 하체는 가냘프다. 중학생 때부터 지독한 관절염을 앓아온 탓이다. 결국 중학교 2학년 때 중퇴하고 검정고시를 봤다. 고교 입학은 했지만 1학년 때는 거의 공부를 못했다. 전교 610명 중 597등도 해봤다. 아파서 학교에 못 갈 때엔 성당에 가서 기도했다. 기도하던 중 "여기가 네 집이다"라는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래서 신부가 되기로 결심했다.

신학생 시절 군 면제를 받고 1년간 서울 상계동에서 시각장애인들과 함께 지낸 시간은 그에게 큰 위로가 됐다.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음식을 입에 넣어 드릴 때에도 '고등어 들어갑니다' '두부 들어갑니다' 해야 합니다.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깨달았지요."

사제 서품 후 환경공학을 전공해 석사 학위를 받았고 성당 주임신부 생활을 하던 2000년 수원교구가 수련 시설용으로 마련한 평창 땅에 생태마을을 세웠다. 평창강이 휘돌아가는 절경 위에 마련된 10만㎡의 생태마을에선 60여종의 유기농 작물을 가꾸고 된장·간장·고추장·청국장을 만든다. 1년에 연인원 5만명이 생태 체험을 하고 황 신부의 행복론을 듣는 힐링 명소가 됐다.

거짓말 같은 기적도 일어났다. 아프리카 잠비아를 돕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중 할머니 한 분으로부터 100억원을 기증받은 것. 할머니는 2인조 강도에게 납치돼 자기 자동차 트렁크에 갇혀 끌려 다녔다. 강도들은 저희끼리 '죽이자'고 수군댔다. 그런데 그 자동차 안에 황 신부의 '화가 나십니까' 강연 CD가 들어 있었다. 1박2일 동안 할머니를 끌고 다니며 본의 아니게 황 신부의 '강의'를 듣던 강도들은 할머니를 풀어줬다. 강도는 "나도 어릴 때 할머니 손잡고 성당에 다닌 적 있다"고 했다. 할머니는 '신부님 덕에 살았다'며 재산 100억원을 황 신부에게 기부했다. 황 신부는 잠비아 정부가 100년간 무상으로 제공한 3274㏊(약 990만평) 땅에 농업대학과 생태 도시를 만들 꿈에 부풀어 있다. 농업대학과 농장 등은 20여년 전부터 현지에서 봉사해온 프란치스코 전교수녀회의 한국 수녀님들에게 맡길 생각이다.

그는 '지금 행복'을 위해선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지금 나눠야 한다' '같이 먹고 마시고 놀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 가르침의 요체도 이것이라 했다. "예수님은 누구하고나 어울려 먹고, 마시고, 놀았습니다. 그냥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 속에 들어가 함께 지내셨습니다. 가족·이웃과 어울려 먹고, 마시고, 논다면 모두가 지금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그가 건넨 '화가 나십니까' CD를 틀었다. 강도들이 들었다는 문제의 CD였다. 불볕더위 속 3시간 가까운 여정이었지만 CD 3장을 연이어 듣다 보니 어느새 서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