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초읍동 어린이대공원 뒤 백양산을 오르다 보면 높이 27m 거대한 석벽을 마주한다. 1909년 부산에 수돗물을 공급하려고 지었던 성지곡 수원지(水源池) 댐이다. 이젠 낙동강 물을 상수원으로 쓰기에 수원지는 인공 호수가 됐다.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콘크리트 중력식 댐이어서 토목사적 가치가 큰 근대 문화유산이라고 한다. 댐 아래쪽 수문에 '飮水思源(음수사원)'이라고 큼지막한 글자가 눈에 띈다. 물 마실 때 수원지 만든 사람들의 노고를 생각하자는 뜻에서 누군가 새겨놓은 문구가 맞춤하다.

▶6세기 무렵 중국 양나라에 유신이라는 문인이 있었다. 그가 서위(西魏)에 사신으로 가 있는 사이 서위가 양나라를 멸망시켰다. 서위 왕은 유신의 문학과 인품을 높이 사 높은 벼슬을 주고 붙잡아뒀다. 그러나 30년 세월이 흘러도 유신의 마음속엔 사라진 조국 생각뿐이었다. 그가 쓴 글 '징조곡'에서 유래한 말이 '음수사원'이다. 오늘의 나 자신이 존재하는 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나를 낳은 근본 뿌리 덕이라는 뜻이다. 유신에게 그 뿌리는 조국 양나라였다.

▶그저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항저우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정상회담하며 '음수사원'을 말했다. 이번 한·중 정상회담의 최대 현안은 한반도 사드 배치였다. 그런데 시 주석은 1930년대 항저우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얘기부터 꺼냈다. "당시 중국 국민은 김구 선생을 위한 보호를 제공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김구 선생 아들 김신 장군이 1996년 중국 방문 중 썼다는 '음수사원 한중우의(韓中友誼)'도 거론했다.

▶항저우 시절 우리 임시정부가 극도로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다. 1932년 윤봉길 의사 상하이 훙커우공원 의거 후 김구 선생에겐 현상금 60만원이 걸렸다. 이때 선생을 피신시키고 항저우 서호 근처에 임시정부가 숨을 곳을 마련해준 게 중국인들이었다. 그랬다 해도 시 주석이 사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음수사원'을 얘기한 것은 과거에 빚진 것 있으니 이참에 갚으라 말하는 것 같아 듣기 민망하다.

▶동양적 미덕으로 볼 때 '음수사원'은 물 마시는 사람이 할 말이지, 우물 판 사람이 할 얘기는 아니다. 더구나 당시 한국인의 항일 독립운동은 중국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윤봉길 의거 후 장제스는 "오호라 부끄럽다. 중국인 4억명이 못하는 일을 한국인 한 사람이 해냈구나" 하고 찬탄했다. 시 주석은 "오늘의 한국이 누구 덕에 있는 것인지 돌아보라"고 얘기하고 싶은 것인가. 그렇다면 중국은 벌써 오만하고 아직 옹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