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경제학자 케인스(John Maynard Keynes,1883~1946)는 "2028년이 되면 기술 발전으로 하루 세 시간만 일해도 되므로

사람들은 엄청난 여가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자동화기기와 로봇이 인간의 업무를 대신하며 일자리를 빼앗고 있지만, 케인스의 예측이 무색할 정도로 요즘 직장인의 삶은 더 바빠지고 있다. 작년보다 올해 더 많은 일을 했다고 응답한 직장인은 90%에 달한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이제 커피 전문점이나 패스트푸드점에서 커피를 직접 가지러 가고 먹고 난 후 뒷처리를 스스로 해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 '매너가 없는 사람', '게으른 사람'으로 눈총을 받는다. 이런 현상은 마트와 레스토랑, 식당 등 유통과 요식업 전반에 걸쳐 확산되고 있다. 유럽에서는 이제 더 이상 소비자가 직접 자신의 서비스를 처리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글로벌 불황이 세계 경제를 강타한 2009년, 프랑스, 영국, 벨기에 등 유럽 각국의 유통업계에서 '무인(無人) 판매' 방식이 빠르게 확산됐다. 영국의 대형 할인점 테스코(Tesco)도 유인 계산대를 없애고 '셀프 계산대'만 설치한 매장을 업계 최초로 선보였다. 스웨덴의 가구 회사 이케아(IKEA) 역시 올 들어 유럽 전역의 매장에 셀프 계산대를 확대 설치했다.

무인 판매 방식의 확산은 전통적으로 서비스의 질이 중시되는 항공업계도 예외가 아니다. 고객이 체크인 카운터를 이용하지 않고 직접 체크인을 하는 '무인(無人) 체크인(check-in) 서비스'가 대표적이다. 에어프랑스, 루프트한자 등 대형 항공사뿐이 아니라 핀에어(핀란드 항공사), 아이슬란드에어(아이슬란드 항공사) 등 군소 항공사도 대부분 도입했다. 이 서비스를 이용하면 고객은 직접 짐 꼬리표를 여행가방에 붙이고, 좌석 위치까지 선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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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현재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2012년 알뜰주유소가 도입되면서 전국에 직접 주유하는 셀프주유소가 생겨났다. 현재 우리나라 항공사 역시 대부분 셀프 체크인을 실시하고 있다.

셀프 서비스가 보편화되고 공유경제가 확산되면서 소비자가 직접 선택하고 처리하는 것도 늘어났다. 항공사의 셀프 체크인 서비스는 소비자가 직접 비행기 좌석표를 보고 원하는 자리를 선택하게 한다. 장을 볼 때도 수많은 사이트의 가격을 비교해가며 원하는 조건의 제품을 찾고 구입한다. 예전에는 판매원에게 물어본 후 바로 그 자리에서 물건을 샀다면, 현재는 물건 하나를 구입하더라도 미리 제품군을 조사 하고 가격을 비교해 원하는 조건의 제품을 찾는다. 쇼핑을 할 때, 투자하는 시간과 고민하는 영역이 대폭 늘어난 셈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패션업체와 음료업체에서는 '나만의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컨셉으로 제품의 '커스터마이징'을 시도하고 있다. 운동화로 유명한 뉴발란스와 컨버스에서는 기존 제품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만들 수 있는 행사를 개최했다. 신발 끈, 신발의 모양, 로고의 위치, 색깔 등을 본인이 직접 선택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운동화를 만드는 것이다. 스타벅스에서는 음료에 들어가는 재료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배합할 수 있는 '나만의 음료'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다. 과거 완제품을 구입하기만 하면 됐던 소비자는 본인이 어떻게 먹고 입을지를 제작과정에서 부터 고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2008년 3월, 타임지(誌)는 '세상을 바꾸는 10가지 아이디어(10 ideas that are changing the world)'란 기사에서 '고객 서비스의 종언(the end of customer service)'을 선언했다. 이 기사는 호텔, 소매점, 공항, 수퍼마켓 등의 카운터 점원이 모두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을 담고 있다. 실제로 2016년 고객 서비스는 무인 서비스, 셀프 서비스라는 이름으로 대체됐다. 무인 서비스 또는 셀프 서비스는 직원이 했던 일을 기계가 대체하거나, 고객이 직접 처리하면서 신속성과 효율성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이것이 소비자에게는 실질적으로 가져다주는 편익은 미비하며 오히려 노동의 양만 증가시킨다는 견해가 나왔다. 격월간지 '하버드 매거진'의 20년차 편집자인 크레이그 램버트(Craig Lambert)는 오스트리아의 사회사상가 이반 일리치가 주창한 이른바 '그림자 노동' 개념을 빌려와 오늘날 현대인들이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고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 때문에 얼마나 바쁘게 사는지 보여준다. 저자는 정보 혁명과 자동화가 진전되면서 '그림자 노동'이 곳곳에서 늘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기사 더보기

램버트가 얘기하는 그림자 노동은 보수를 받지 않고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포장된 노동을 의미한다. 회사는 직원에게, 기업은 소비자에게, 기술은 사람에게 이 일들을 떠넘기고 있다는 것이다.

기업은 소비자에게 그림자 노동을 떠넘긴다. 쇼핑, 여행, 레스토랑의 서비스마처 '셀프'가 되면서 소비자는 알게 모르게 그동안 직원이나 종업원이 해주던 일을 떠맡게 됐다. 저렴한 비용은 미끼일 뿐. 셀프 주유소에서 직접 주유하고, 식당에서는 종업원의 서비스를 받는 대신 직접 주문용 키오스크를 사용하고, 음식을 날라야 한다.

인터넷 여행 사이트는 여행사 직원들이 가지고 있던 독점적인 전문 지식을 대중화한 동시에 여행객이 떠안는 수많은 그림자 노동을 만들어 낸다. 직접 여행 동선을 짜고, 최저가 비행기표와 숙박권을 찾기 위해 손품, 발품을 팔아야 한다.

그는 출퇴근 행위 역시 고용주에게 이익이 되는 무급의 노동이라고 설명한다. 매일 평균 1시간 이상의 시간과 돈을 잡아먹기 때문이다. 1주일에 한두 번만 재택근무를 허용하면 길에서 내버리는 막대한 시간을 아낄 수 있지만, 회사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 출퇴근 시간에는 대가를 지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랩버트에 따르면 미국의 통근자는 평균 25.7㎞를 이동하며, 1년에 4400달러의 비용을 지출한다고 썼다. 시간으로는 약 217시간. 1년 중 5주를 무급으로 일하는 셈이다. ▶기사 더보기

인터넷 예매와 쇼핑·뱅킹처럼 그전에는 매장이나 창구 직원들이 처리했던 일들이 소비자들에게 떠넘겨지면서 사람들은 극장이나 항공기의 좌석 배치표를 직접 고르는 '자율성'을 얻게 됐다. 하지만 자기 시간을 '무료로' 바치는 상황에 직면했다. 셀프 주유에서 공항과 호텔의 셀프 체크인까지 사람들이 '셀프 서비스'라는 이름의 자잘하고 사소한 '일'에 시간을 점령당한다. 램버트는 "돈도 받지 않고 일해주는 고객들에게 일을 넘김으로써 막대한 인건비를 줄일 수 있는 기회를 거부하는 자본가는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 인터뷰] 기술 발전으로 사람들은 더 많은 '잡일'을 떠안게 됐다]

기계로 대체되는 무인 서비스는 안그래도 장기불황으로 고통받고 있는 세계 고용시장의 사정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고 있다. 식당의 셀프서비스와 카페에서 모바일 앱 주문은 종업원의 설 자리를 집어삼켰다. ATM기 서비스로 출납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의 수를 줄인 은행은 앞으로 대출상담, 금융상품 판매까지 고객이 직접 모바일과 통신으로 처리 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기계 또는 로봇 자동화로 할 수 있는 영역이 확대되면서 로봇 같은 신기술의 발전이 대대수의 일자리를 대체할 것으로 보인다.

싱가포르 이스트코스트에 있는 롱헝 시푸드 레스토랑. 간판에 '최초의 자동화 로봇 서비스 음식점'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키 1m50㎝에 앞치마와 스카프를 두른 로봇 두 대가 빨간 눈을 반짝이며 음식이 담긴 접시를 나르고 있었다. 루시와 메리라는 이름을 가진 로봇들이 바닥에 깔린 유도선을 따라 지정된 테이블 앞에 멈춰 서면 인간 종업원이 음식을 손님 앞에 내려놓았다. 로봇에서 "안녕하세요. 음식이 도착했습니다. 맛있게 드세요"라는 중국어 인사말이 흘러나왔다. 이 로봇은 생일을 맞은 손님에게 축가도 불러준다.

이 레스토랑은 올해 초 개업하면서 싱가포르에서는 처음으로 로봇 웨이트리스를 도입했다. 홍보 효과도 있지만, 무엇보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이 식당 프랭크 리우 지배인은 "이 정도 규모의 음식점이라면 서빙 직원이 15명 필요하지만 로봇 덕분에 8명만 있어도 된다"며 "로봇은 휴식 시간이나 병가가 필요 없는 것도 장점"이라고 했다. ▶기사 더보기

자동화·로봇으로 인한 일자리에 대한 위기감은 자동차·조선 같은 생산직뿐 아니라 그동안 인간만 할 수 있는 영역으로 인식됐던 사무직과 서비스업으로도 퍼지고 있다.

기계가 대신 일을 처리함으로써, 오히려 개인이 떠맡아야 하는 일은 더 많아지고 있다. 일자리는 줄어들고 스스로 처리해야하는 '그림자 노동'은 증가하는 이 아이러니는 생활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림자 노동'은 식당이나 사업체에서 기계와 로봇으로 자동화을 이뤘을 때 늘어난다.

패스트 푸드점이나 캐주얼 식당에서는 자동판매기를 통해 미리 비용을 지불하고 원하는 메뉴를 터치해 직접 받아가 먹는 것이 일상화됐다. 고객이 직원 대신 기술을 직접 처리하면서 해야하는 일이 늘어난 경우다.

은행이나 ARS 서비스에서도 마찬가지다. 대면 서비스를 받지 않고 은행 ATM기 앞에서, ARS 수화기 앞에서 원하는 서비스에 도달하기 위해 눌러야 하는 버튼과 기다려야 하는 시간과 행위 역시 모두 '그림자 노동'이다.

인터넷과 기술이 발달할수록 이런 현상은 심화된다. 사람들은 인터넷 상의 수많은 정보 중의 어떤 것이 진짜 정보인지 찾아내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또한 웹상에 만들어놓은 수많은 계정들을 관리하고 사생활을 지키기 위해 비밀번호를 바꾸거나, 정보를 어디까지 제공할지를 고민한다. 모두 과거에는 없었지만 기술의 발전으로 생긴 해야할 일들인 것이다.

램버트는 '그림자 노동'으로 우리는 수많은 자질구레한 일을 하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현대에는 이런 그림자 노동을 기꺼이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자신의 그림자 노동을 다른 방법으로 최소화 시키려는 문화도 등장했다.

그림자 노동을 '즐기는 사람들'은 쇼핑과 집안일 같은 일을 자신의 취미로 여기는 사람들이다. 램버트가 무언가를 구입할 때 들어가는 조사 시간과 노력을 '그림자 노동'이라고 봤다면 이들은 이를 즐거운 쇼핑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원하는 가격에 물건을 구입했을 때 뿌듯함을 느끼기도 한다.

원래 가구노동자들이 하던 일을 소비자에게 맡긴 이케아. 소비자들은 이케아 제품을 구입하면 해야하는 그림자 노동이 늘어나지만, 이를 기꺼이 즐기는 사람도 있다.

또한 물건에 대해서 자신이 조금 더 참여했고 만들었다는 데서 오는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심리를 파고든 기업이 이케아(IKEA)다. 이케아는 ‘DIY(Do It Yourself)’를 앞세운 판매 전략을 통해 가구 공장의 노동자들이 월급을 받고 하던 일을 손님들이 직접 하게 만들었다. 그림자 노동이 생산 단계까지 침투한 것이다. 소비자는 물건을 만드는 '노동'을 떠맡게 됐지만, 막상 이 노동으로 보람을 느끼고 좋아한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서서히 늘어가는 사소한 일들을 아웃소싱으로 해결하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가사도우미 서비스이다. 예전에는 중산층 가정집에서나 볼 수 있었던 가사도우미는 지금 현재는 대학생들이나 맞벌이 부부들도 이용하는 서비스가 됐다. 이들은 정작 자신들의 본업에 밀려 해결하지 못하는 '그림자 노동'인 가사 일을 다른 외부의 사람을 통해 해결한다.

제사상 차리기, 장보고 음식 만들기 등 전통적으로 그림자 노동이라고 본 일을 대신 해주는 업체들도 늘고 있다.

고향인 경기도 성남을 떠나 26.5㎡(약 8평) 크기 원룸에서 혼자 자취를 하고 있는 서울 지역 로스쿨생 김모(26)씨는 2주에 한 번 청소도우미를 부른다. 로스쿨 입학 후 잠잘 때를 제외하곤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보니 화장실 변기나 싱크대 하수구 청소는커녕 방 청소도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청소도우미 비용은 기본 4시간에 4만원이다. 방 청소부터 부엌 싱크대·화장실 변기·창·문틀 청소, 장롱 속 속옷 정리까지 해준다. 김씨는 "비싼 식당에서 밥 한 끼 먹는 것보다는 훨씬 현명한 소비라 생각한다"고 했다. ▶기사 더보기

미국에서는 그림자 노동을 고객에게 전가시키지 않고 1:1 대면 서비스를 해주는 대신 돈을 받는 팁(tip) 문화가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다. 그러나 우리를 비롯한 대부분 문화권에서는 식당을 이용할 때, 음식 가격에 공간과 서비스에 대한 이용료가 포함되어 있다고 여겨온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종업원들이 해주던 서비스들이 고객의 몫으로 전가되면서 일부 고급 식당이나, 테이블 마다 담당 서버를 둔 업소에서는 일종의 서비스 차지(service charge)라는 것이 붙이기도 한다. '그림자 노동'을 당연히 소비자가 해야 할 노동이라고 보고 이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댓가를 받는 문화가 서서히 퍼지기 시작하고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기업은 인건비를 줄이고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이점을 얻었다. 하지만 소비자는 알게 모르게 자잘한 일을 떠맡으면서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그림자 노동'으로 보내게 되었다. 결국 시대가 흐를수록 소비자들이 맡아서 처리해야 하는 일은 늘어났지만 정작 혜택은 줄어든 것이다. '그림자 노동의 역습' 책을 쓴 램버트 편집장은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일 돈, 시간 세 가지 라고 한다면 그중에 제일은 시간이다. “시간은 돈이다(Time is money)”라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처럼, 많은 사람의 시간을 잡아먹는 그림자 노동의 개념을 통해 일상을 한번 돌이켜 보길 바란다."고 말한다. 할인을 받기 위해 어떤 일을 하거나 무언가를 끊임없이 조사할 때 이 일이 정말 나에게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중요한 일인지를 따져보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