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만에 컴백콘서트 하던 전날도 1시간은 잤는데, 해인이 만나는 전날 밤엔 한숨도 못 잤어요. 너무 설레어서."

17일 서울역 4층에 있는 경양식집 '그릴'. 미국으로 떠난 뒤 20년 만에 만난 이해인(71) 수녀를 가수 박인희(71)는 애틋한 눈길로 바라봤다. "암 투병 중이라는 것도 몰랐다니까요. 바보같이…." 친구의 목소리가 잦아들자 수녀가 호탕하게 웃으며 농담했다. "그러게. 하마터면 내 장례식에나 올 뻔했다구, 하하!" 닷새 휴가를 얻어 서울에 온 이해인 수녀는 단짝 박인희와 나흘 내 함께 다녔다고 했다. "바빠서 인희 컴백콘서트에도 못 가봤어요." 이날 박인희는 이해인 수녀를 서울역으로 배웅 나온 길이었다. "이달 말 미국 들어가면 내년에나 다시 올 수 있으니."

박인희 대표곡 '모닥불'에 관한 재미난 일화가 있다. 갈현동 신혼집에 놀러 온 이해인 수녀가 '모닥불'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수녀님들 즐겨 부르는 노래가 있는데 참 좋더라. '모닥불 피워놓고 마주 앉아서~'로 시작하는데, 원곡 부른 가수의 목소리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하더라고. 너도 그 노래 아니?" 묵묵히 듣던 인희는 '모닥불'과 함께 자신의 얼굴이 실린 레코드를 가져와 친구에게 조용히 내밀었다.

어제 보고 오늘 만난 것처럼

이해인 수녀 팬카페인 ‘민들레 영토’ 식구들과의 만남 자리에 가수 박인희가 함께했다.

―대학로 샘터 사옥에서 재회하셨다 들었다.

"막상 문이 딱 열리고 해인이를 보는데 그냥 어제 보고 오늘 만난 사람 같더라. '어, 인희 왔어?' 하길래 나도 '해인이야?' 하고 손을 흔들었지."(박)

"난 수도 생활하며 절제를 잘 배워가지고 울고불고 안 한다(웃음). 만나면 원망부터 하려 했지. 신비주의로 나가려고 연락도 안 하고 말이야."(이)

―96년 미국으로 떠나면서 수녀님과는 왜 연락을 끊었나?

"음반사, 방송사에서 자꾸 해인이 괴롭힐까 봐. 내 연락처를 알면 친구가 괴로울 것 같았다."(박).

―두 분 다 사망했다는 오보 해프닝이 있었다.

"나는 교통사고 나서 죽었다고 하더라(웃음)."(박)

"난 암투병하다 뉴질랜드에서 죽었다더니 언제는 또 시애틀에서 죽었다는 소문이 떠돌더라. 인희는 계룡산에서 노래 지도하는 걸 봤다는 사람도 있던데, 얘나 나나 덤으로 사는 셈이다."(이)

―미국에선 어떻게 지내신 건가.

"아주 평범하게 살았다. 인터넷도 없이 그야말로 원시인처럼. 이마 꼭대기 큰 주름이 모자를 눌러 써서 생긴 거다. 여행하고, 산책하고, 글감 떠오르면 메모하고, 곡도 간혹 쓰고. 풍문여고 선배인 김을동 언니 손자들 나오는 한국 예능프로 보며 깔깔거리기도 했다."(박)

두 사람 만났다는 소식에 팬카페 '박인희와 함께'에는 박씨가 쓴 '어떤 해후'라는 시가 올라왔다. '전화를 걸 수 있을 때보다/전화를 걸 수 없을 때가/더욱 간절한 그리움이다'로 시작하는 시에는 '너의 간절한 그리움과/나의 사무치는 보고픔이/보름달 되어/하나의 가슴이 될 때/약속이 없이도/마주칠 수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 두 사람은 "시처럼 68년 만에 '풀 문'(보름달)이 뜬 날 다시 만났다"며 사춘기 소녀처럼 좋아했다.

생일에 찍은 흑백사진 한 장

―여중 시절 서로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해인이는 예쁘고 명랑해서 인기가 많았다. 우리가 서로 말이라도 나누면 질투하던 아이들이 어찌나 많던지."(박)

"남학생들한테 인기가 많아 그중 누구랑 결혼해야 할지 몰라 수녀원 갔지, 하하! 인희는 너무나 조용조용해서 가수가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이)

―두 분이 함께 찍은 흑백사진 한 장이 화제였다.

"내 생일에 사진관 가서 찍었다. 미국 가면서 책이며 레코드, 사진을 다 털어버렸는데 이번 컴백콘서트 할 때 모교 교장 선생님이 이 사진을 보여주시더라. 어떻게 구하셨느냐 물었더니 동창생 중 누가 보내줬다는 거다. 해인이 만나 그 얘길 했더니 '그게 누구겠어? 나지' 하더라."(박)

―중2 때 헤어진 친구가 수녀 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분이 어떠셨는지.

"수녀가 되면 이 세상과 영영 이별하는 줄 알았다. 편지도, 전화도 해서는 안 되는 줄 알았지. 돌아보니 수녀인 해인이가 나보다 더 세상과 열심히 소통했더라. 많은 사람들 마음을 헤아리고 위로하며 살았더라."

"수녀는 내가 아니라 인희였지. 파계한 수녀, 하하!"(이)

"그렇잖아도 컴백콘서트 하자며 미국에 날 만나러 온 분들이 파계한 수녀처럼, 비구니처럼 은둔하며 산다고 팬카페에 전했다더라. 긴 생머리도 그대로였으니. 해인이가 날 보자마자 '파마 좀 하지 그러니?' 하더라.(웃음)"(박)

해마다 이맘때면 나오는 이해인 수녀의 캘린더(위). 중학 시절 이해인 수녀와 주고받은 쪽지 편지글과 자신의 시와 에세이를 묶어 펴낸 ‘우리 둘이는’(도서출판 청맥), 그리고 시집들.

―숙명여대 불문과 시절에 지은 '얼굴'이란 시는 이해인 수녀를 그리워하며 적은 시라던데.

"한시도 해인이를 잊은 적 없다. 한번은 그 시가 KBS 라디오에 나오는데 DJ가 박인환의 시라고 소개하더란다. 그게 박인희가 쓴 시라고 정정하게 한 것도 해인이라고 들었다."(박)

―수녀님은 70년대 만인의 '첫사랑'으로 불리던 가수 박인희가 친구라는 사실에 놀랐을 것 같다.

"이번 컴백콘서트에 중년 남자들이 구름처럼 왔다더라. 난 아줌마들만 좋아하는데 말이지, 하하!"(이)

울고 싶어도 못 우는 널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경양식집이라는 '그릴'에서 이해인 수녀는 오므라이스를, 박인희는 야채볶음밥을 주문했다. "요즘은 오므라이스 파는 곳도 없어. 어릴 적 오므라이스, 카레라이스 해주시던 어머니를 기억하면서 먹지." 친구에게 시 한 편 낭송하라고 주문도 했다. 박인희는 시 '얼굴'을 투명한 목소리로 읊었다. "안 들려 얘. 좀 더 크게!" 수녀님 타박에 웃음이 터졌다.

―세월을 실감하시는지.

"해인이가 어릴 때보다도 더 밝고 유머러스해진 것 같다. 다시 만난 날 비가 왔는데, 검은 수도복 입는 친구를 배려해 난 검은 우산을 가져왔더니 친구는 파란색 고운 우산을 펼쳐 들었더라. '이런 날일수록 여인은 화사해져야 한다'면서. 꼬물꼬물 가방에서는 엽서며 스티커 같은 예쁜 것들이 얼마나 많이 나오던지."(박)

―대장암을 이겨내셨다.

"통증이 10이면 8이라고 답하며 잘 참아낸다고 '여장부'란 별명이 생겼다. 울어야 독소도 빠진다고 해서 밤 열한 시 성모병원 성당에 가서 앉았는데 눈물이 안 나. 동료 수녀들이 '시는 예민하게 잘 쓰는데 고통에 대한 감각은 둔하다"며 놀려서 섭섭할 만큼(웃음). 아무튼, 생존율 30% 이겨내고 8년이 지나 이렇게 오므라이스도 먹고 인희도 만났으니 감사할밖에."(이)

―투병 전후로 달라진 점이 있다면?

"감사도 깊어지고 사랑도 애틋해지고 기도도 간절해지고. 내 시 중에 '울고 싶어도 못 우는 너를 위해 내가 대신 울어줄게'라는 시구(詩句)가 있다. 마취에서 깨어날 때 내가 그 시구를 중얼거리더란다."(이)

―나이 듦이 서글프진 않은지,

"내겐 20대가 오히려 회색이었다. 우울하고 희망이 없었다. 노년이 되면 마음에 평화가 오고 웬만한 건 삭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콘서트 오셔서 '첫사랑'이 너무 늙어 충격받은 분들도, 20대 맑은 목소리가 아니라 실망하신 분들 있겠지만 난 두렵지 않았다. 가수로서 재기해야 한다는 명성에 대한 욕심은 요만큼도 없으니. 그저 날 기다려준 분들께 신발 벗고 큰절 드리고픈 마음일 뿐이다."(박)

―대통령 일로 많은 사람이 우울하다.

"어머니는 우리가 누굴 원망하면 이런 말씀 하셨다.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있겠나.' 비판하되 좀 더 성숙하고 품위 있는 말로 했으면 좋겠다. 각자 자신의 모습도 돌아보면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