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현봉학 박사

19일 오후 서울 남대문 세브란스빌딩 광장에서 열린 고(故) 현봉학(1922~2007) 박사 동상 제막식. 머리가 희끗한 초로(初老)의 손양영(66)씨와 이경필(66)씨가 동상을 어루만지며 "선생님 덕분에 저희가 무럭무럭 자라서 이젠 손자를 업고 다니는 할배가 됐습니다"라고 말했다.

현 박사는 연세대 의대의 전신인 세브란스의전을 마치고 버지니아주립대 의대에서 유학한 의사다. 6·25전쟁에 미군 통역 장교로 참전한 그는 1950년 12월 24일 중공군에 밀려 퇴각하는 미군을 설득해 흥남항에서 민간인 9만1000여명을 남한으로 피란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손씨와 이씨는 군함과 민간 선박을 합쳐 총 193척이 동원된 흥남 철수 작전 당시 피란민을 태운 마지막 수송선인 '메리디스 빅토리호(7600t급)'에서 태어났다. 당시 정원의 7배인 1만4000명이 탄 빅토리호에선 아이 다섯 명이 태어났다. 미군은 신생아들을 태어난 순서대로 '김치 1~5'라고 불렀다. 출산을 지켜본 미군 병사가 '한국 하면 김치'라며 붙인 애칭이었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태어나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아이들을 미군은 '크리스마스의 선물'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손씨와 이씨가 바로 김치 1과 김치 5였다. 다른 3명의 신원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내가 김치5” “난 김치1” - 이경필(왼쪽), 손양영(오른쪽)씨가 19일 오후 서울 세브란스빌딩 광장에서 열린 현봉학 박사 동상 제막식에 참석해 손가락으로 숫자 5와 1을 표현하고 있다. 1950년 흥남 철수 때 메리디스 빅토리호에서 태어난 아기 5명 중 손씨가 첫 번째, 이씨가 다섯 번째였다는 의미다.

함경도 북청 출신인 손씨 가족은 원래 피란은 꿈도 꾸지 못했다고 한다. 영하 20도의 엄동설한에 만삭인 손씨 어머니가 육로(陸路) 피란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손씨 부모는 '기적을 바라는 심정'으로 흥남 부두에 갔다. 부두를 꽉 채운 다른 피란민들처럼 이 부부도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절박했던 이 부부에게 기적을 선사한 사람이 현 박사였다. 현 박사는 막역한 사이였던 미군 포니 대령과 여러 차례 미 10군단장 에드워드 아몬드 소장을 찾아가 애원했다.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가려는 피란민들을 배에 태워주세요. 여기서 떠나버리면 저기 있는 모든 사람은 중공군의 공격에 몰살당하고 말 것입니다." 병력 10만5000명을 철수시키는 것만으로도 힘든 상황이었지만 아몬드 소장은 두 사람의 간절한 설득에 배에 싣고 있던 군수품을 버리고 피란민의 승선을 허락했다.

손씨는 "부모님이 어렸을 때부터 '넌 흥남 부두 마지막 배에서 태어났어'라고 말해주셨지만 우리 가족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게 현 박사님 덕분인 줄은 한참 나중에야 알았다"며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해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날 제막식에 참석한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현 박사님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북한 공산 치하를 탈출하고 싶어 했던 10만명의 피란민은 대한민국에 내려올 수 없었을 것이고 저도 태어나지 않았을 것 같다"고 말했다. 문 전 대표의 부모도 흥남에서 미군 함정을 타고 거제로 내려왔다.

이씨는 현 박사 동상 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날 새벽 경남 거제에서 올라왔다. 빅토리호가 내려준 거제에 정착한 이씨는 ROTC에 지원해 전방 사단에서 나라를 지켰고, 피란선에 함께 탔던 형은 비둘기부대원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이씨 아들 역시 공군사관학교를 마치고 조종사로 군 복무 중이다. 이씨 아버지가 평소 자식들에게 "우리가 살 수 있었던 건 피란민을 위해 배를 대준 선생님들 덕분이다.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나라를 지키는 데 꼭 힘을 보태야 한다"고 신신당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씨는 4년 전부터 전국 각 대학을 돌며 흥남 철수 관련 역사 특강 봉사를 다니고 있다. 지난 2013년엔 미국을 방문해 현 박사를 도와줬던 포니 대령의 묘역도 참배했다. 이씨는 "젊은 사람들이 현 박사처럼 나라와 민족을 위해 애쓰신 '숨은 영웅'의 정신을 이어받는다면 우리나라에 어떤 고난이 닥쳐도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