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석 경제부 기자

지난해 가을 공정거래위원회 간부와 만났을 때다. 대화 도중 그에게 정부 고위 당국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통신칩 분야 절대 강자인 미국 퀄컴이 삼성, LG 등 휴대전화 제조사에 행했던 '갑질'을 공정위가 한창 조사하던 시점이었다. 전화를 건 고위 인사는 정부 안팎의 우려를 전달했다. "퀄컴에서 불만이 많다더라. 공정위가 무리하는 것 같다는 얘기도 있다. 대미 관계를 고려해 절차적인 하자는 없도록 신중하게 하라."

퀄컴은 가능한 수단을 모두 동원해 공정위를 주저앉히려 애썼다. 공정위에 협박성 메시지도 보냈다. "당신네는 큰 실수 하는 것이다. 중국 경쟁 당국이 당신네 하는 걸 배우면 조만간 삼성과 LG가 중국에서 우리와 같은 운명을 겪을지도 모른다." 일본, 유럽도 저지하지 못한 퀄컴의 횡포를 우리 정부가 막을 수 있겠느냐는 회의론도 나왔다.

2년 넘는 조사를 거쳐 지난해 말 퀄컴에 1조300억원이란 과징금을 매기기까지 공정위는 이런저런 험로를 거쳤다. 연쇄 폭발적 반응이 이어졌다. 공정위 제재가 나온 지 3주 만에 미 연방거래위원회(FTC)가 퀄컴을 연방법원에 제소했다. FTC는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부당하게 경쟁 반도체 회사의 시장 진입을 막았다"고 했다. 우리 공정위 판단을 따라온 것이다. 그뿐 아니다. FTC 제소가 이뤄진 지 사흘 만에 애플도 퀄컴에 횡포를 당했다며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애플은 "우리가 한국 공정위 조사에 협조했다며 퀄컴이 10억달러를 내놓으라고 압박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유럽, 대만에서도 퀄컴에 대한 제재를 시작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그동안 공정위에 한두 번 실망한 게 아니었다. 은행 금리 담합 의혹처럼 흐지부지 끝낸 사건이 여럿이었고, 증거 조사를 대충 했다가 기업과의 법정 다툼에서 패해 고개를 떨군 적도 많았다. 하지만 이번 퀄컴 제재는 끈기 있게 몰아붙여 성과를 거뒀다.

선진국 정부도 건드리지 못했던 거물을 잡았다는 의미만 있는 건 아니다. 탄핵 정국으로 대다수 공무원이 일손을 놓은 시기에 온갖 압력을 이겨내고 세계적 관심을 불러모은 결과물을 내놨다는 점에서 점수를 받을 만하다. 국내 관료들이 전 세계에 '먹히는 상품'을 선진국 관료들보다 먼저 내놓은 흔치 않은 사례다. 파이낸셜타임스(FT),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이 공정위 행보를 비중 있게 다뤘다. 국익의 관점에서는 애플과 퀄컴의 미국 내 '집안싸움'을 유도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효과를 거뒀다.

무엇보다 소비자 후생(厚生)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공정위 본연의 임무를 해냈다. 퀄컴이 최근 7년간 삼성, LG 등을 통해 우리나라에서 올린 매출 38조원은 휴대전화 값에 반영돼 소비자가 지불해온 돈이다. 이제 그 비용을 줄일 물꼬를 텄다. 퀄컴 제재는 정권 말기 무기력증에 시달리며 국민의 질타를 받고 있는 관료 사회에 신선한 파장을 가져왔다. 퀄컴을 조사한 공정위 담당 공무원들은 박수받을 자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