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대통령 파면은 역설적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건강함을 증명했다. 탄핵 과정 자체가 살아있는 시민교육의 현장이었다. 하지만 우리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한 과도한 낙관론은 금물이다. 민주주의의 꽃인 여론 정치가 독과(毒果)를 낳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는 본질적으로 포퓰리즘이 내장되어 있다. 단순히 민중의 요구를 따르는 것만으로는 심각한 현실의 문제들을 풀어낼 수 없다.

대중영합주의가 나라를 파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독재가 대중의 적극적 동의와 묵인 위에서 진행된다는 대중독재론이 의미심장하다. 히틀러는 다수 독일 시민의 지지로 합법적으로 집권했을 뿐 아니라 제3제국의 욱일승천은 당시 독일 대중의 열렬한 환호 속에 진행되었다. 정치 전문가들과 언론의 허를 찌른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당선과 좌충우돌도 미국 대중의 적극적 지지 위에서 가능했다. 곳곳에서 독버섯처럼 피어나는 포퓰리즘의 의미를 숙고(熟考)해야 오늘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포퓰리즘적 민주주의가 중우정치로 이어져 나라를 망친 고전적 사례가 아르기누사이 해전(BC 406)이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겨룬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404) 때의 전투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실질적 승부처는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비롯된 '장군들의 재판'이었다. 이 해전에서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승리했지만 침몰한 아테네 전함의 부유물(浮游物)에 승무원 1000여 명이 아직 매달려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폭풍우가 다가오는 데다 스파르타군 추격에 바빴던 8명의 아테네 장군들은 구조 작업에 나설 수 없었다.

승전보에 환호하며 장군들을 기리는 법안을 민회에서 결의했던 아테네 시민들은 구조 지연에 분노하며 장군들을 재판에 회부한다. 순식간에 일어난 반전(反轉)이었다. 군중의 표변에 반대한 사람은 소크라테스가 유일했다. 그리하여 아테네 장군 2명이 망명하고 6명은 처형된다. 정확한 사정을 장군들의 처형 직후 알게 된 아테네 시민들이 뒤늦게 후회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변덕스러운 민심이 숙련된 해군 지휘부 전체를 제거한 것이다. 1년 후 아이고스포타미 해전에서 아테네 해군은 전멸했다. 해양 제국 아테네의 멸망을 재촉한 것은 적군(敵軍)이 아니라 포퓰리즘이었다.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들의 토론회가 21일 오후 서울 상암동 MBC 스튜디오에서 열렸다. 왼쪽부터 이재명 성남시장, 문재인 전 대표, 안희정 충남지사, 최성 고양시장.

한국 민주주의에서도 대중영합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대표적인 포퓰리스트는 이재명 후보다. 이에 비해 안희정·안철수 후보는 상대적으로 균형감이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차기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큰 문재인 후보가 내놓은 정책의 포퓰리스트적 함의가 특히 심각하다. 국가재정으로 공공 부문 일자리 81만개를 새로 만들겠다는 문재인의 공약이야말로 전형적인 대중영합주의다. 늦은 정년과 고액 연금을 감안하면 공공 부문의 81만개 일자리는 앞으로 수십년간 매해 수십조원 이상의 국민 세금을 필요로 한다. 4대강 사업을 매년 새로 하는 격이다. 훨씬 열악한 처지의 비(非)공공 부문 1000만명이 공공 부문 80만명을 부양하는 망국(亡國)의 공약이다. 국가 부도 상태인 공무원 천국 그리스의 길을 따르는 위험한 발상이다.

문 후보는 강력한 기득권인 대기업 노조와 공무원들의 권익을 옹호한다. 문재인식 포퓰리즘은 노조 바깥에서 고통받는 천문학적 숫자의 비정규직 노동자와 저임금 정규직 근로자를 외면한다. 거대 노조와 공무원이 자신의 주요 지지 기반이기 때문이다. 문 후보는 사드 배치 이슈에서도 민심을 거역한다. 최근의 KBS 여론조사에 의하면 사드 배치 찬성 52%, 반대 35%로 찬성이 절반을 넘는다. 다른 모든 여론조사에서도 사드 배치 찬성이 반대보다 훨씬 많다. 이는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문재인의 포퓰리즘이 당파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사안에 따라 국익도 무시하고 국민 다수의 의사도 거부하면서 지지층만을 추종한다.

‘Anything but Park’(박근혜 지우기)을 바라는 민심이 차기 대선을 쓰나미처럼 휩쓸어가고 있다. 박근혜는 이미 과거가 되어버렸다. 중요한 건 미래의 정치 리더십이며 절박한 우리의 삶이다. 민주주의를 빙자한 포퓰리즘이 민생 경제와 국가 안보를 해결하는 건 불가능하다. 변덕스러운 여론을 넘어서는 숙의(熟議)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화급한 이유다. 2012년의 중대 실수가 반복되면 대한민국은 돌이킬 수 없는 국망(國亡)의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후보자들을 매의 눈으로 검증하고 또 검증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포장된 포퓰리즘이 민주주의를 망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