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흠 前 외교안보연구원장

"지도자는 역사의 흐름을 만들지 못한다. 그것을 타고 갈 수 있을 뿐이다." 프로이센 재상 비스마르크가 말한 독일 통일의 비결이다. 역사가 전진만 한다면 그의 말대로 지도자는 흐름을 타기 쉬울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에선 후퇴가 잦아 혼란을 겪고 잘못 대응하면 화를 당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1914년에 터질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드물었다. 편을 갈라 싸우게 되는 영국과 독일, 미국과 독일의 상거래가 개전(開戰) 직전까지도 활발해 각국 주식시장도 전쟁 가능성을 낮게 봤었다. 경제 교류 규모가 크면 서로의 이익도 커 전쟁을 벌이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은 빗나갔고 1000만 명이 죽었다. 승패와 상관없이 잃은 생명과 재산이 막대해 모두 패자(敗者)가 된, 그래서―모든 나라 지도자가 하나같이 어리석어 저질렀다는 이유를 빼면―왜 싸웠는지 후세가 모를 전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이름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붙여졌다. 그전까진 다시없을 참극이라는 뜻으로 '대전쟁(Great War)'이라고 했다. 전후 세계는 국제연맹을 만들고 군축조약을 맺으며 자유무역을 좇아 공존공영의 시대를 여는 것 같았다. 그러나 1929년 시작된 대공황이 흐름을 바꿨다. 국내 경제가 나빠지자 각국은 앞다퉈 배타적 경제블록을 만들었고 이 경쟁에서 밀린 독일과 일본이 침략에 나서 2000만 명이 희생되는 또 한 번의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르펜도 프랑스 우선주의…"EU 탈퇴하고 이민 80% 줄이겠다"-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FN)의 마린 르펜 대표가 2017년 2월 5일(현지 시각) 리옹의 한 체육관에서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고 있다. 유럽의 대표적 극우 포퓰리스트인 르펜은‘프랑스 우선주의’기치를 내걸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선 공약과 비슷한 반(反)이민, 반이슬람, 보호무역주의 등의 공약을 내놓았다.

이 전쟁 중에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대재앙을 낳는 과오를 반복하지 않겠다며 처칠 영국 총리와 대서양헌장을 채택하고 전후 통화와 무역의 새 질서를 세우기로 했다. 유럽의 평화는 소련과, 아시아의 평화는 중국과 손잡고 지킬 생각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전쟁이 끝나자 계획이 틀어졌다. 동구와 중국이 공산화되며 세계가 동서로 갈렸기 때문이다. 냉전은 소련이 무너지며 끝났고 그때 미국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자유민주주의가 영원한 승자라며 '역사의 종언'을 말했다. 그렇게 개방, 관용, 진취의 시대가 정착하는 줄 알았는데 지금 우리는 역사의 다른 진행을 지켜본다. 지구촌 곳곳에서 배타주의, 고립주의가 부활하고 있다. 국적, 인종, 종교의 구별 없이 더 많은 사람이 더 큰 번영을 더 평화롭게 누리기 위해 미국이 이끌어온 자유주의 질서가 후퇴하는 모습이다.

세계대전, 냉전, 지역통합같이 세계를 바꾼 변화는 늘 유럽에서 시작됐다. 신앙 충돌, 세계화 역풍, 냉전 부활 조짐 같은 작금의 역사 역류 현상도 그곳에서 먼저 나타났다. 그래서 주목하는 것이 4~5월 프랑스 대선이다. 여론이 부패한 기성 정치권에 등 돌리면서 희박하다던 극우 인사 마린 르펜의 당선 가능성이 열렸다. 섬나라 영국이 없어도 EU는 견딘다. 그러나 르펜 주장대로 프랑스가 빠지면 그땐 끝장이다. EU가 해체되고 유럽 각국이 사람과 물건의 왕래를 제한하던 시절로 돌아가면 그 영향은 전 세계에 미치고 자유주의 질서는 한층 퇴조한다.

동아시아에선 긴장의 파고가 이미 높다. 중국은 서태평양에서 미국을 밀어내려 하고 주변 국가들을 힘으로 압박한다. 미국은 중국의 불공정무역, 남중국해 진출, '하나의 중국' 원칙을 문제 삼고 있다. 은근하게 군사력을 키워온 일본은 평화헌법 개정을 꾀한다. 군사력을 외교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명실상부한 강대국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북한이 끝 모를 도발을 이어가는 한반도는 언제든 대재앙의 진원지가 될 수 있다.

시대가 위인을 낳기도 하고, 위인이 시대를 낳기도 한다. 한반도 주변의 격동하는 역사 흐름을 타고 갈 수 있는 지도자는 누구인가. 그가 누구이든 이 나라의 안녕을 지키고 한반도 주변에 조성된 위기를 통일의 기회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