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 3분의 2 끝내다. 마지막 막음은 완전히 말린 다음에 하자. 피카소 옹 떠난 후 이렇게도 적막감이 올까."

뉴욕에서 뇌출혈로 숨을 거두기 1년 전 김환기(1913~1974)가 쓴 1973년 4월 10일 일기다. 그가 경외하던 파블로 피카소가 죽은 지 이틀 뒤, 김환기는 '고요 #310'을 그리며 거장을 추모했다.

생의 고독과 적막을 담은 김환기의 청색점화(靑色點畵) 'Tranquility(고요) 5-IV-73 #310'〈사진〉이 한국 현대 미술 경매 최고 판매가를 경신했다. 12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K옥션에서 열린 경매에서다. 가로 205㎝, 세로 261㎝ 거대한 이 푸른색 추상화는 65억5000만원에 낙찰돼 최고가를 기록했다. 지난해 11월 서울옥션 홍콩세일에서 김환기의 노란색 전면점화(全面點畵) '12-V-70 #172'가 63억3000만원에 낙찰된 지 불과 5개월 만이다.

'고요'는 밤하늘 은하수를 연상시키는 점들과 화면 한복판을 과감히 분할한 사각의 흰색 띠가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추상화다. 박미정 환기미술관장은 "선승들이 명상의 정점에 도달했을 때의 고요가 느껴지는 그림"이라며 "세상의 엄청난 소음 속에서도 명징한 자기세계를 갖고 있는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김환기 불패 신화는 2년 전 시작됐다. 2015년 10월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 47억2100만원에 낙찰된 '19-Ⅶ-71 #209'가 박수근의 '빨래터'(45억2000만원)를 뛰어넘으면서다. 이어 지난해 4월 '무제'(1970년작)가 48억6700만원으로 기록을 경신했고, 6월(54억원), 11월(63억3000만원)까지 4차례나 최고가 기록을 갈아치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