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선·작가

기사단장 죽이기(전 2권) |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각 568·600쪽 | 각권 1만6300원

지난 2월 25일, 무라카미 하루키 신작 장편소설 '기사단장 죽이기'를 일본 출간 하루 만에 DHL로 배송받아 원어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7월 12일, 대략 다섯 달 만에 번역본이 출간됐다.

'1Q84' 이후 7년 만에 출간된 장편 소설. 하루키 자신의 기준으로 '색체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장편이 아니다. 이 엄청난 두께의 두 권짜리 장편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어느덧 그의 예전 작품들을 하나하나 되새기는 추억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만큼 신작 '기사단장 죽이기'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존 작품들에서 사용된 모티프를 두루 모아 집대성했다.

우선, 신작 소설의 주인공은 36세 남자인 '나'다. 그간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에서 가장 빈번히 등장한 나잇대의 남자다. 삼십대 중후반이라는 나이는 세상사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만큼 성숙하면서도 세속적으로 변질되기에는 얼마간의 순수함을 간직한 나이. 그래서 큰 이야기를 이끌어가기 적합한 화자라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말해왔다. '나'는 여전히 말수가 적고, 아날로그적 감성을 편애하며, 청결과 살림에 세심하게 신경을 쓰는 한편, 여자와의 성관계엔 무심한 듯 관대하다.

구체적인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기사단장 죽이기'의 주인공은 아내의 사랑을 잃게 되는데, 상실감은 '여자 없는 남자들'과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을 비롯해 숱한 하루키 소설을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다. 또한 '나'는 이웃에 사는 수수께끼의 중년 남자 '멘시키'와 함께 사건에 휘말리며 묘한 동류 의식을 가지게 되는데, 이는 '색채가 …'에서 주인공 쓰쿠루가 '브로맨스'적인 교감을 맺는 남자 후배 '하이다'를 떠올리게 한다. 사건의 발원지로 기능하는 숲 속의 신비한 돌무덤은 '태엽 감는 새'의 우물을 연상시키는가 하면, 상처의 치유를 위해 지방으로 여행 가는 대목은 '해변의 카프카''댄스 댄스 댄스'의 떠나는 장면들을 소환시킨다. '기사단장'이라는 형이상학적 캐릭터가 등장해서 '나'를 이끌어가는 전개는 '양을 둘러싼 모험''양사나이'의 그것과 유사하다. '멘시키'의 연인이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양상은 '노르웨이의 숲'에서 거듭 등장하는 허무한 죽음들과 많이 닮아 있다.

박상훈 기자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으면서 특히 많이 떠올린 작품은 '1Q84'였다. 각 작품에는 '마리에'와 '후카에리'라는 순수하면서도 똑 부러진 소녀가 나와 '나'에게 동기부여하는 역할을 맡는다. 반대로 '하얀 스바루 포레스터의 남자'와 'NHK수금원'처럼 '나'를 교란시키는 기분 나쁜 악역도 나란히 등장한다. 두 작품 공히 현실과 비현실이 교차하며 이야기가 진행되는 가운데 '1Q84'는 일본의 광신도적인 공동체주의를 비판하고 '기사단장 죽이기'는 1937년 난징대학살의 참혹상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며, 작가는 자신의 정치적인 견해를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사소하게는 이번 작품에서 모차르트 오페라 '돈 조반니'를 상징적인 음악으로 기용한 것도 과거 그의 궤적과 일치한다.

기존 작품들과의 유사성이 곳곳에 눈에 띄면 낯익음과 친근함에 피식 미소 짓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명백한 자기복제와 동어반복에 "또냐?" "지겹다" 소리가 절로 그 뒤를 이을 수도 있겠다. 물론 자세히 보면 달라진 점들도 몇 가지 있지만.

일단, 주인공 직업이 새롭다. '기사단장 죽이기'에선 처음으로 '예술가' 등장인물이 출연한다. 하루키는 한 저녁 모임에서 초상화 화가를 우연히 소개받아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면서 새 소설 주인공의 직업을 자연스럽게 결정했다고 한다. 처음 다루는 직업군인 만큼 하루키는 화가의 기법과 관점, 예술가의 희망과 절망을 성실하게 연구해서 섬세하게 묘사한다.

전체적인 톤도 기존 소설들에 비해 조금 더 진중하고 차분해졌다.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호불호 특징으로 알려진 특유의 멋 부린 말투, 재치 있지만 얄밉기도 한 비유, 그럴싸한 아포리즘(명언)은 최소한으로 억제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의 결말을 짓는 방식이 달라졌다. 이전 소설들이 주로 상실로 시작해 주인공의 내적 성장으로 마무리 지었다면 이번 작품은 상실한 것을 회복하고, 더불어 그 너머의 이야기로 확장한다. 심지어 놀랍도록 따뜻하다.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도 작가는 진일보한 결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저 자신이 나이를 먹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뭔가를 이어나가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렇다 하더라도 '기사단장 죽이기'는 '하루키 스타일'을 총체적으로 한결같이 고수한다. 작가 입장에선 몇 가지 새로운 시도를 도모했겠지만 그를 꾸준히 읽어온 '충성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익숙해서 마음껏 편히 즐기거나 혹은 익숙하다 못해 이젠 물려서 이참에 하루키를 졸업해버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하루키적 요소가 고루 섞여 있다는 같은 이유로, 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 입문자들에게는 도리어 꽤 알찬 '하루키 월드' 입문서가 되어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사단장 죽이기’

36세의 초상화 화가인 ‘나’는 어느 날 아내로부터 이별을 통보받고 무작정 여행을 떠난다. 그 후 친구의 아버지인 거물 일본화가 아마다 토모히코의 산장에 정착하는데, 새벽에 기이한 종소리가 울리는가 하면 다락방에서는 아마다의 그로테스크한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가 발견된다. 한편, 이웃에 사는 수수께끼의 인물 멘시키는 소녀 마리에의 초상화를 의뢰하고 ‘나’는 두 사람의 관계와 악몽 같은 그림을 둘러싼 비밀을 탐색하면서 불가사의한 사건들을 마주한다.

'기사단장…'가 되풀이하는 하루키 스타일

'여자 없는 남자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상실감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브로맨스
'태엽 감는 새': 우물
'해변의 카프카' '댄스 댄스 댄스': 지방 여행
'양을 둘러싼 모험': 양사나이
'1Q84': 순수하고 똑 부러진 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