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정 사회부장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평안북도에서 태어났다. 가난을 겨우 벗어난 자작농 집안이었다. 고향에서 소학교를 나와 경성에서 사범학교를 마치고 귀향해 교편을 잡았다. 해방을 고향에서 맞았지만 공산주의를 경험한 얼마 후 월남했다. 그 후 한 번도 고향에 가지 못했다. 세상을 뜰 때까지 북쪽 가족을 그리워했다. 하지만 전후에 태어난 나는 아버지의 그런 향수(鄕愁)를 공감하지 못했다. 내가 공감한 것, 그리고 지금껏 감사하는 것은 짧은 공산주의 경험을 토대로 고향을 등진 70년 전 아버지의 탁월한 선택이다. 세상을 뜬 지 30년이 지났지만 “남한 사람들은 북한을 너무 모른다”는 아버지 음성이 또렷하다. 그만큼 거듭 말했다. 월남 직후 아버지가 남쪽 동창에게 들은 말은 “양키와 친일파, 악질 자본가, 악질 지주, 간상모리배, 반동분자가 판을 치고 있는 너절한 이곳을 왜 찾아왔느냐”는 핀잔이었다. 북한 소식을 접할 방법이 없는 남쪽 출신일수록 자신이 살고 있는 남한에 대한 멸시가 강했다고 한다. 그럴수록 북에 대한 환상도 심했다. 아버지는 일생 그들을 설득하려고 했다. 가족이 볼 때도 ‘왜 저러시나’ 하고 의아해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실향민에겐 독특한 사고방식이 있다. 아버지를 보면서 알았다. 우리 현실을 판단할 때 종종 고향의 현실과 대비하는 일종의 버릇이다. 그들이 남쪽 타향에서 환영받았을 리 없다. 변변한 재산도 가져오지 못했다. ‘삼팔따라지’ 소리나 들으면서 밑바닥에서 시작한 인생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우리 현실을 긍정적으로 보고 적응하려고 했다. 고향의 가혹한 현실과 대비하는 습관 때문이다. 물론 내 주변 실향민에게 느낀 한정된 경험이다. 극소수라고 믿지만 남쪽행(行)을 후회한 실향민도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반공(反共) 이야기를 자주 했다. 실향민의 입버릇이다. 고등학생 때부터 그 소리가 싫어졌다. 공허했다. 하지만 역사를 공부하면서 이 공허한 ‘안티테제’가 우리 현대사에 가져온 엄청난 결과에 놀랐다. 1948년 우리는 처음으로 ‘국민 주권’ 원리가 적용된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었다. 그 후 숱한 풍파를 거치면서 이 원리는 돌이킬 수 없는 국가의 기본으로 다져졌다. 1953년 우리는 6·25전쟁 휴전과 함께 미국과 동맹을 맺었다. ‘반공’ 깃발을 흔들면서 한반도를 떠나는 미국을 설득하고 위협하면서 맺은 동맹이다. 동맹이 아니었다면 한반도는 지금껏 크고 작은 전쟁에 시달렸을 것이다. 동맹이 가져다준 안정의 토대에서 우리는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를 계기로 세계 자본주의 질서에 완전히 들어가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맹활약했다. 그 결과가 오늘의 번영이다. 이들 이외에 해방 후 남북이 확연히 다른 길을 간 원인을 찾을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오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72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문재인도 이승만·박정희의 역사 속에 있다"]

아버지는 1988년 서울올림픽 두 해 전 세상을 떴다. 상당수 실향민이 그랬듯 아버지 역시 올림픽을 봤다면 복받치는 감격에 울었을 것이다. 물론 당시 국민 대부분이 대한민국의 성공을 기뻐했다. 실향민은 여기에 다른 감동을 더 느꼈다. "이런 너절한 곳에 왜 왔느냐"는 소리를 들으면서 고향을 등지고 선택한 체제의 멋진 승리였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듯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어제 광복절을 맞아 경축사를 발표했다. 그가 실향민의 가족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그의 참모였다면 우리 현대사의 성공도 언급할 것을 건의했을 듯하다. '이명박' '박근혜'가 아니라 '문재인'이기 때문에 더 울림이 컸을 것이다. 국민은 더 감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친일부역자와 독립운동가의 처지가 달라지지 않더라는 경험이 불의와 타협을 정당화하는 왜곡된 가치관을 만들었다"는 말이 '해방 후' 언급의 거의 다였다. 해방 직후 월남한 아버지가 친구에게 들은 '너절한 나라' 소리를 다시 듣는 것 같았다. 대통령은 여기에 건국절 논쟁까지 더했다. 꼭 이랬어야 할까.

문 대통령은 ‘해방 후’보다 ‘해방 전’ 이야기를 주로 했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큰 가치를 부여했다. 물론이다. 대통령 언급대로 “광복은 항일의병에서 광복군까지 애국선열들의 희생과 헌신이 흘린 피의 대가”였다. 하지만 미국이 흘린 피가 없었다면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없었다.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동맹이 아니었다면 해방 후 우리의 오늘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정된 경축사에 근현대사 전부를 담을 수는 없다. 그래도 일정한 비중으로 언급은 했어야 한다. 좌우 균형을 말하는 게 아니다. 오늘을 사는 현대인에게 독립투쟁보다 번영의 현대사와 동맹의 가치가 더 소중하고 절실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