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두산 포수 양의지가 작년 NC와의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투수에게 사인을 잘 보여주기 위해 손톱에 노란색 매니큐어를 칠하고 경기에 나선 모습.

자신의 '전략'을 숨김없이 만천하에 알리는 사업가는 없다. '영업 비밀'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두뇌 싸움으로 통하는 야구도 예외는 아니다. 사인(sign)은 공 하나하나에 승부가 오가는 다이아몬드 위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영업 비밀이다.

이 사인을 두고 최근 메이저리그가 발칵 뒤집혔다. 뉴욕 양키스 구단이 "보스턴 레드삭스가 지난달 경기 중 전자 기기를 활용해 사인을 훔쳤다"고 메이저리그 사무국에 알린 것이 발단이 됐다. 롭 맨프레드 MLB 커미셔너는 즉각 조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7일(한국 시각) 뉴욕 타임스가 보도한 레드삭스의 '사인 훔치기' 과정은 첩보전에 가깝다.

우선 상대 포수의 손가락이 잘 보이는 가운데 외야석에서 사인을 몰래 촬영한다. 이 영상은 별도로 마련된 비디오실로 전송돼 해독 과정을 거친다. 상대팀 사인의 일정한 패턴을 분석한 뒤엔 더그아웃에 있는 코치에게 전달된다. 이때 매개체가 스마트 워치(애플 워치)다. 평범한 시계가 한순간에 '범죄 도구'로 변하는 것이다. 이 정보는 여러 번 전달을 거쳐 2루 주자에게 최종 배달된다. 포수의 사인을 육안으로 확인한 2루 주자는 상대 배터리(투수와 포수)가 결정한 구질을 즉각 타자에게 알리게 된다. 무슨 공을 던질지 미리 알고 방망이를 휘두르는 셈이다. 완전 범죄로 묻힐 뻔한 이 작전은 경기 중 레드삭스의 트레이너가 자꾸 시계를 쳐다보는 장면을 양키스 벤치가 확인하면서 꼬리가 잡혔다.

사실 MLB에선 '사인 훔치기' 금지 규정이 따로 없다. 상대방의 사인을 훔치는 게 불법이 아닌 것이다. 맨프레드 커미셔너도 6일 언론 인터뷰에서 "사인 훔치기는 오래전부터 경기 일부로 받아들여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훔치는 행위를 상대에게 들켰을 땐 빈볼 같은 험한 꼴을 감수해야 한다.

이번 사건에서 문제가 된 것도 '도둑질' 자체가 아니라 '통신 가능한 전자 기기'의 사용이었다. 2001년 당시 샌디 앨더슨 메이저리그 사무국 수석 부사장이 모든 구단에 이와 관련한 지침을 처음 내렸다. 메이저리그는 구단들이 다양한 야구 통계와 정보를 활용할 수 있도록 지난해부터 애플사의 '아이 패드'를 더그아웃에 반입하게 했다. 단, 사무국으로부터 승인된 애플리케이션만 사용해야 하고, 경기 중엔 인터넷 접속이 금지된다.

국내 프로야구에선 '사인 훔치기'와 '더그아웃 내 전자 기기 이용'을 전면 금지하고 있다. '불공정 정보의 입수 및 관련 행위 금지'란 제목의 리그 규정이 2008년 처음 만들어졌고, 2010시즌부터 본격 적용됐다. KBO(한국야구위원회) 관계자는 "2000년대 초·중반만 해도 팀 전력 분석원이 더그아웃에서 자유롭게 노트북을 썼다"며 "부정행위 논란이 계속 이어지면서 아예 명문화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규정을 위반한 사례가 지금까지 딱 한 번 있었다. 2015년 9월 12일 한화―롯데 경기에서 스마트 워치를 착용한 한화의 일본어 통역이 퇴장당했다. 당시 TV 중계 화면을 통해 이 스태프가 더그아웃에서 스마트 워치를 찬 사실이 확인됐고, KBO 연락을 받은 대기심에 의해 경기장을 떠났다.

한국이 처음부터 사인 훔치기에 엄격했던 건 아니다. 선수 출신의 한 야구 해설위원은 "예전엔 코칭 스태프가 '이기기 위해선 상대 사인이라도 빼앗아야 한다'고 선수단에 공개적으로 요구했다"고 했다. 하지만 세대가 바뀌고 야구 문화가 달라지면서 최근엔 사인 훔치기 행위가 줄었다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KT와 SK의 올 시즌 개막전에선 두 팀 사령탑(김진욱·트레이 힐먼)이 "젠틀하게 야구하자. 사인 훔치기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