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학봉 산업1부장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9월 28일 의회를 해산할 때만 해도 선거 전망은 안갯속이었다. 국유지 헐값 매각으로 촉발된 '사학(私學) 스캔들'로 아베 총리의 지지율이 급락했고 지난 7월 도쿄도 의회 선거에서 압승한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도쿄도지사가 '아베 총리 대안'으로 각광받고 있었다. 민진당의 마에하라 세이지 대표가 야당 후보 단일화를 위한 무공천을 선언하면서 '정권 교체 드라마'의 기적이 연출되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도 있었다.

하지만 본선에서 아베 총리는 너무 싱겁게 압승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북풍(北風)이 일본 총선 결과를 갈랐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로 고조된 일본 국민의 위기의식과 "전쟁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아베 총리의 내셔널리즘이 만들어낸 선거 결과라는 것이다. 아베 총리에 비판적인 아사히(朝日)신문은 "아베 총리는 한반도 정세 덕을 보는 정치인"이라고 폄하했다. '역사 왜곡' 문제로 아베 총리를 부정적으로 보는 분위기가 강한 한국에서도 "극우 정치인이 '운발'로 압승했다"는 식의 언론 보도가 이어졌다.

정말 그게 전부일까. 아베 총리의 경제 성적표를 보면 선거 결과는 운이나 야당의 무능도, 북풍 덕도 아니다. 2012년 12월 취임 당시 9800이던 닛케이 지수가 최근 2만2000을 돌파했다. 실업률은 2012년 말 4.33%에서 최근 2.89%까지 급락했다. 대졸자 취업률이 2011년 91%에서 올해 97.6%로 치솟았다. 고졸자 취업률도 98%로, 완전고용에 가깝다. 사상 최악이랄 정도로 취업난을 겪고 있는 한국 대학생들이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갈 정도다. 2012년 12월부터 시작된 일본 경기 회복 추세가 58개월째 지속되고 있는데, 이는 전후 둘째로 긴 경기 회복이다. 일본 야당은 일자리가 늘어난 것은 고령화로 인한 인력 부족 때문이며, 주가가 오른 것은 돈을 찍어 내는 정책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11일 오후(현지시각) 베트남 다낭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문재인 대통령이 촬영장으로 이동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보고 있다.

하지만 과거 민주당 정부는 물론 자민당 정부에서도 없었던 일관된 경기부양정책을 아베 총리가 펴고 있고 그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일본 야당은 아베 총리 집권 이후 선거 때마다 '아베노믹스'를 비판했지만, 별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야당은 대안 없는 비판만 하는 무책임한 정당이라는 낙인이 찍혔고 이번 아베 총리의 압승에 한몫했다.

이번 선거에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아베 총리의 지지층이 20대로 확산됐다는 점이다. 'TV아사히'의 선거 출구조사 결과, 20대가 49%로 지지율이 가장 높았고 오히려 나이가 많은 50대(32%)와 60대(30%), 70대 이상(37%)의 지지율이 떨어졌다. 보수적인 고령자층이 그를 열렬하게 지지할 것이라는 '상식'을 깨고 20대 지지율이 강세를 보인 것은 '취업난 해결'이라는 아베노믹스의 성과 덕분일 것이다. 아베 총리가 중의원 선거 전날 밤 마지막 거리유세 장소로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도쿄의 아키하바라를 택한 것도 젊은 층의 지지에 대한 자신감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아베 총리의 압승은 일본 사회의 '우경화'가 아니라 일본 국민의 '현실주의' '실리주의(實利主義)'의 반영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경제위기를 타개한 정치 지도자가 선거에서 압승하는 것은 글로벌 상식이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지난 9월 총선을 통해 4선 연임을 달성한 비결도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실업률이 최저치를 기록한 경제 성적표 덕분이다.

역사 왜곡 발언, 독도 영유권 주장 등으로 아베 총리와 일본에 대한 한국 사회의 시각이 '우경화 패러다임'에 지나치게 경도돼 있는 것은 아닐까. 'G2 시대'라고 해도 일본은 '세계 경제력 3위'의 경제 대국이고 동북아 세력 균형의 한 축이다. 아베 총리와 일본을 제대로 보지 않고서는 한국이 일본을 극복할 수도, 활용할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