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필 특파원

태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각국이 교통 인프라 확충을 위해 돈을 쏟아붓고 있다. 지난 8일 태국 의회는 수도 방콕에서 파타야, 라용주(州)로 이어지는 동부 해안에 2021년까지 총 1조5000억바트(약 51조3200억원)를 투자한다는 내용의 '동부경제회랑 개발사업' 관련 법안을 통과시켰다. 동남아시아 최대 규모의 국책 개발 사업이다. 이 국책사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교통 인프라 구축 사업이다. 태국 정부는 해당 지역의 고속철도 건설과 기존 철도 복선화, 파타야 인근 우타파오 국제공항 업그레이드 등을 위해 5100억바트(약 17조4500억원) 이상을 투입할 계획이다. 이 사업과는 별개로 지난해 12월에는 방콕과 북동부 나콘랏차시마를 잇는 1790억바트(약 6조1200억원) 규모의 고속철도 건설 사업이 첫 삽을 떴다. 방콕 시내에서도 도시철도 노선을 확장하는 사업이 한창인데, 여기에는 4000억바트(약 13조6800억원)가 투입된다.

베트남은 교통 인프라 확충에 500억달러(약 53조6000억원)를 투자한다는 야심 찬 계획을 밀어붙이고 있다. 2030년까지 고속도로 총 연장을 2009년 대비 10배로 늘리겠다는 계획이다. 최대 도시 호찌민과 수도 하노이에서도 각각 도시철도 6, 8개 노선이 건설 중이거나 계획 단계에 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도 지하철 공사가 한창이다. 필리핀에서는 마닐라에 도시철도 지하 노선을 신설하고 소형 버스인 '지프니' 20만대를 현대화하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교통 체증에 경제 발목 잡힌 동남아

동남아 각국이 교통 인프라 투자에 열을 올리는 것은 심각한 교통 문제가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동남아의 교통 인프라는 최근 10여 년 새 크게 확대됐다.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에 따르면 2004년부터 2014년까지 10개 회원국의 포장도로와 고속도로, 철도 총 연장이 각각 54%, 86%, 40% 늘었다. 그러나 이 정도 확장으로는 급속한 도시 인구 증가와 경제 성장을 뒷받침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평가다. 아시아개발은행(ADB)에 따르면 동남아 주요 7국이 지금과 같은 속도로 경제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교통·물류 부문을 포함해 인프라에 2030년까지 매년 평균 1470억달러(약 157조5800억원)가 투자되어야 한다. 그러나 같은 기간 실제 투자가 이뤄질 것으로 추정되는 금액은 필요액의 37.4% 수준인 550억달러(약 58조9600억원)에 불과하다.

동남아시아 각국이 교통 인프라 확충에 나섰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는 이 나라 최초의 도시철도가 지어지고 있고(위), 말레이시아에선 지난해 7월 수도 쿠알라룸푸르와 인근 카장을 잇는 지하철이 개통됐다(가운데). 모두 심각한 교통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한 투자다. 아래 사진은 지난해 1월 베트남 수도 하노이 도심 도로에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뒤섞여 있는 모습.

동남아 주요 대도시는 성공의 기회를 찾아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북적이면서 매일 펼쳐지는 교통지옥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최근 글로벌 교통정보업체 인릭스의 조사에서 태국은 조사 대상 38국 가운데 최악의 교통 체증 국가로 이름을 올렸다. 태국은 수도 방콕을 중심으로 하는 광역 도시권에 1500여만명이 몰려 산다. 방콕 주민들은 매년 평균 64시간을 길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로 허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 2위의 교통 체증 국가는 수도 자카르타의 교통 체증으로 악명 높은 인도네시아였다. 자카르타 일대에는 무려 3100여만명이 살지만 도시철도는 찾아볼 수 없고 도로만이 유일한 통행로다. 이 때문에 도심 자동차의 평균 주행 속도는 시속 10㎞가 채 되지 않는다. 베트남 호찌민은 하루 유동 인구가 2700만명에 달하지만 대중교통은 버스뿐이다. 그마저도 필요 대수(2만1000대)의 7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오토바이가 주요 교통수단…오토바이 산업 부상

차량·철도 시설이 태부족한 상태에서 대안으로 발달하고 있는 것이 오토바이 교통이다. 미국 시장조사업체 프로스트앤드설리번에 따르면 자카르타 주민의 16%, 방콕 주민의 27%가 오토바이를 주요 교통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특히 도심 도로 폭이 왕복 2~4차로에 불과한 호찌민은 오토바이 이용비율이 93%에 달해 '오토바이의 천국'인 것으로 나타났다. 호찌민을 관통하는 사이공 강에는 건너는 다리마다 오토바이 전용 차로가 설치돼 있을 정도다.

오토바이를 활용한 산업도 발달하고 있다. 동남아에서 탄생한 유니콘(기업 가치 10억달러 이상 스타트업) 7개 가운데 가장 큰 2개가 오토바이를 주력 사업 수단으로 쓰고 있다. 말레이시아·싱가포르의 그랩은 오토바이 기사와 승객을 앱으로 연결해줘 오토바이를 택시처럼 이용할 수 있게 한 '그랩바이크' 서비스로 세계 최대 차량 공유 서비스업체 우버를 물리치고 동남아에서 시장점유율 75%를 차지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고젝은 오토바이 기사들이 택시, 요식 배달, 대신 장 보기, 구매 대행, 방문 청소, 마사지, 자동차 수리 서비스 등 온갖 서비스를 제공해주며, 인도네시아 유통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동남아에 대규모 인프라 시장 열린다

그러나 오토바이가 교통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는 것이 동남아 국가들의 판단이다. 특히 호찌민은 주민의 90% 이상이 오토바이를 이용하면서, 도로에 적정 수용량의 3.5배에 달하는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달리고 있다. 이에 따라 오토바이로 인한 교통사고 증가, 대기오염 심화 등의 문제는 동남아 대도시들의 공통된 고민이다. 동남아에서는 오토바이가 적은 편인 라오스에서조차 오토바이 교통사고 문제가 심각해 '오토바이 이용자들에게 헬멧을 씌우기만 해도 인구 사망률이 뚝 떨어질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을 정도다.

동남아의 교통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도로·철도·공항·항만 등 교통·물류 인프라를 대폭 확대하는 수밖에 없다. 자체 자본과 기술만으로 교통 인프라 수요를 감당할 수 없는 동남아 각국은 국제기구와 다른 국가에 손을 벌리고 있다. 세계 교통 인프라 건설 업계에는 새로운 기회의 땅이 열린 것이다. 이미 한국·중국·일본 등의 기업들이 거대한 동남아 인프라 시장을 두고 치열한 경쟁에 들어갔다. 국제 신용평가회사 피치의 자회사 BMI리서치는 최근 보고서에서 "아세안의 육상 교통 인프라시장 규모가 2020년까지 연평균 9.4%씩 성장해 2020년에는 505억달러(약 54조1400억원)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