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미국 공립학교 인종분리정책의 철폐를 이끌어낸 린다 브라운이 76세의 일기로 25일(현지 시각) 오후 생을 마감했다.

AP는 이날 브라운의 동생이자 ‘브라운 재단’의 설립자인 셰릴 브라운 헨더슨이 미 캔자스주 토피카 현지 신문을 통해 이를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는 성명을 통해 “린다 브라운은 그의 가족과 함께 백인우월주의의 궁극적 상징인 공립학교 내 인종분리를 끝내기 위해 용감히 싸웠던 젊은 영웅 중 한명”이라며 “그는 평범한 학생들이 어떻게 미국을 변화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는지 보여주는 본보기이고, 그의 희생은 (인종간) 장벽을 부수고 미국에서 평등이 갖는 의미를 바꾸어 놓았다”고 애도했다.

◇ “흑인과 백인은 함께 교육받을 수 없다”…교육위 상대로 소송

린다 브라운은 그의 이름을 딴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판결로 오늘날 흑인인권운동의 상징이 됐다. ‘브라운 대 교육위’, ‘브라운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이 판례는 미국 연방 대법원이 당시 남부 17주에서 백인과 유색인종이 같은 공립학교에 다닐수 없게 하는 주법을 위헌이라고 결정 내린 획기적인 사건이다.

미국 캔자스주 토피카에 살던 린다는 매일 아침 6블록을 걸어 버스 정류장까지 간 뒤, 거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4km나 떨어진 먼로 초등학교에 통학했다. 집에서 불과 7블록밖에 떨어지지 않은 섬너 초등학교도 있었지만 갈 수 없었다. 섬너 초등학교는 백인 전용 학교였기 때문이다. 린다의 나이 8살,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당시 미국에서는 1896년 ‘플레시 대 퍼거슨’ 판결에 의거, 흑인 학교와 백인 학교가 분리되어 있었다. 이는 ‘분리하되 평등하게(separated but equal)’, 즉 피부색을 이유로 나눠져도 시설물이 동등하면 미 수정헌법 14조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논리로 인종차별정책을 정당화한 판결이다. 하지만 ‘시설물의 공평한 제공’은 말 뿐이었다. 특히 미국 남부의 흑인 시설은 백인 시설보다 더 열악했다.

린다는 1985년 브라운 판결을 재조명한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통학길이 굉장히 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그때를 회고했다. 그는 “겨울이면 학교 가는 길에 울곤 했다”며 “너무 추워서 흘린 눈물이 얼도록 걸었다. 학교 가는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온 적도 많았다”고 했다.

보다 못한 아버지 올리브 브라운은 섬너 초등학교에 전학을 신청했다. 하지만 교장과 시 교육위원회는 이를 거절했고, 이에 그는 같은 흑인 부모 13명(자녀 20명)과 함께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 58년 된 인종차별정책 뒤집어…흑인인권운동 도화선 된 ‘브라운 판결’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소송은 1952년 연방 대법원까지 올라갔다. 델라웨어·버지니아·사우스캐롤라이나 등에서도 비슷한 소송이 잇따랐고, 결국 3년간의 심리 끝에 대법원은 1954년 5월 17일 역사에 한 획을 긋는 판결을 내렸다. ‘플레시 대 퍼거슨’의 대법원 판결을 58년만에 뒤집으며 공립학교에서의 인종분리는 위헌이며, 분리된 교육시설은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고 결론내린 것이다.

대법원은 이듬해인 1955년 두번째 판결을 통해 빠른 시일 내에 공립학교의 인종통합 실시를 명령했다. 하지만 대부분 학교는 거세게 반발했고, 특히 남부 주에 속한 백인 학교 3000여개 중 2300여개는 1957년까지 대법원의 이행명령을 거부했다. 그러나 인종간 벽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고, 브라운 판결은 공공시설과 공공장소의 인종분리 폐지를 주장하는 흑인인권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린다 브라운의 전학을 거절했던 미국 캔자스주 섬너 초등학교.

브라운 판결은 차별을 해소하는 구체적인 소송방법과 문제 해결 방법을 보여준 모범사례라는 평을 듣는다. 이는 흑인 노예 해방 이후 100여년간 지속됐던 인종차별정책을 폐기한 판결로, 린다 측 변호사였던 더굿 마셜은 후에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연방 대법관이 된다.

브라운 판결은 ‘사회과학적인 헌법판단’을 했다는 점에서 여타 판결과 다르다. 당시 마셜 변호사는 수백명에 달하는 사회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법원에 제출하며 ‘소수설’을 주장했다. ‘백인은 주류, 유색인종은 소수’라는 개념을 골자로 하는 소수설을 통해 그는 “학교를 인종에 따라 나누는 것은 유색인종을 기존의 노예 신분에서 최대한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라고 강조했다.

얼 워런 당시 대법원장은 이러한 사회과학적 연구 결과를 판결문에 인용, 마셜의 변론을 받아들였다. 사회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소수설이 하나의 상식이 되어있다는 마셜의 주장을 토대로 내려진 브라운 판결은 미 남북전쟁에 이어 두번째 흑인 혁명으로도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