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왕에 공이 많고 덕이 두터운 신하 몇 명을 선택하여 종묘에 배향(配享·위패를 함께 모시는 의식)하는 법이 있다. 순종 부태묘를 앞두고 지난 3일 영친왕으로부터 이왕직 장관을 경유해 박영효 후작, 민영휘 자작 이하 19명 예전 원로 대신과 친척들에게 배향할 신하를 협의하여 상품하라는 분부가 있었다. 그 결과 문헌공 송근수, 충문공 김병시, 충숙공 이경직, 효문공 서정순이 당선됐다. 이를 이왕직 장관에게 보고하니 최고점인 김병시와 이경직을 보류하고 전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후작을 첨입해 3인으로 재결했다는 공문이 구신 친척들에게 내려왔다. 이에 박영효씨 이하 아홉 명이 10일 오전 11시경 낙원동 민영휘씨 집에 모여 숙의 끝에 불가(不可)함을 장관에게 통지해 회답을 기다리게 되었다.’ 1928년 5월 11일 자 동아일보 석간 2면 기사다. 제목은 ‘순종 부태묘 배향 이완용 후작 가부?’. 조선일보는 일본군 중국 출병을 반대하는 5월 9일 자 사설로 네 번째로 무기 정간 중이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이거다. '순종 3년상이 끝나고 순종 위패를 종묘에 모시는데, 함께 모실 공신(功臣) 4명을 원로들이 추천했더니 그 가운데 2명이 빠지고 이완용이 들어 있더라. 그래서 원로들이 반대하는 중.' 다음은 원로 대신 명단이다.

박영효, 민영휘, 윤덕영, 윤용구, 조동희, 이재곤, 이지용, 이윤용, 한규설, 박기양, 이하영, 이우면, 민상호, 고희경(이상 조선 귀족)과 김만수, 윤용식, 서상훈, 남규희, 정만조. 윤용식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1910년 경술년 한일 병합과 함께 일본 황실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거나 친일 행위를 한 사람들이다. 식민 조선 대표 친일자들이 친일 거두 이완용을 공신으로 인정 못 하겠다고 결의했다. 개들이 개를 물어뜯는 꼴이었다. 추잡스러운 권력투쟁이 벌어진, 그날로 가본다.

조선의 명예, 종묘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처음 한 일은 종묘 건설이었다. 토지신과 곡식신을 섬기는 사직단(社稷壇)과 함께 조상신을 섬기는 공간이 종묘(宗廟)였다. 성리학으로 일관한 조선 정치 집단에 종묘와 사직은 목숨보다 귀한 존재였다.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위패를 모신 종묘.

1910년 조선이 사라졌다. 1392년 건국 후 518년 만이었다. 이름만 남은 왕, 일본 속국 조선의 쇼토쿠노미야 이왕(昌德宮李王) 순종은 '정기적으로 종묘에 제사하고 때때로 성 밖 역대 왕릉 성묘 외에 궁문 밖으로 나오는 경우는 천황에게 줄 축사를 의뢰하기 위해 남산 총독 관저를 방문하는 정도였다.'(이왕직 사무관 곤도 시로스케·權藤四郞介, '이왕궁 비사', 1926년, 이언숙 번역 '대한제국 황실비사') 상궁 김명길도 '덕수궁 나들이 외에 창덕궁 밖 행차는 종묘에서 제사를 지내거나 선왕들 능 참배할 때'라고 회상했다.(염복규,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 재인용) 허울뿐인 왕, 순종에게도 종묘는 소중했다. 권한도 책임도 없던 그 순종이 죽었다. 1926년이다.

친일파의 이권 투쟁

초록(草綠)은 동색이다. 하지만 똑같지는 않다. 친일파도 마찬가지다. 나라를 팔아먹은 목적은 나라 판매 자체가 아니라 부귀영화였다. 매국 이후 부귀영화를 둘러싸고 이들은 여느 정치판과 다름없이 권력 투쟁을 벌였다. 투쟁 무대는 '이왕직(李王職)'이었다.

이왕직은 대한제국 황실 재산과 사무를 관리하는 조직이다. 일본 궁내성 직속 기관이다. 황실 재산에는 기존 부동산과 현금은 물론 경술년 병합조약에 따라 해마다 150만~180만원에 이르는 세비(歲費)가 포함됐다.(김대호, '일제하 종묘를 둘러싼 세력 갈등과 공간 변형') 이권이 굉장했다. 수장인 장관은 5대 시노다 지사쿠(篠田治策·1932~1940)를 제외하고 조선인이, 차관은 일본인이 맡았다. 막대한 돈을 주무르는 장관직을 둘러싸고 친일 세력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서울 종묘 정전 맞은편 공신당(功臣堂)은 조선왕조 역대 배향공신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닫혀 있다가 제사가 벌어질 때 열린다. 배향공신 95명 가운데 83명 위패가 이 공신당에 모셔져 있다. 1928년 대한제국 마지막 총리대신 이완용이 배향공신에 선정됐다. 다른 친일 귀족들이 벌 떼처럼 반대해 실제로 배향되지는 못했다. 12년 뒤인 1940년 이완용은 아무도 몰래 공신당에 모셔졌다가 해방과 함께 쫓겨났다.

친일 세력은 두 갈래였다. 윤덕영파와 이완용파. 자작 윤덕영은 순종의 비(妃)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다. 왕실 근친 세력이다. 이완용파는 친일 관료 세력이다. 총독부는 이완용파를 지지했고 왕실은 윤덕영파를 지지했다. 이왕직 사무관 곤도는 "왕가를 중심으로 노련한 이완용과 민첩한 윤덕영이라는 양대 거물의 쟁탈전이 전개됐다"고 했다.(곤도 시로스케, '이왕실 비사') 승자는 이완용이었다. 순종은 이완용을 싫어했다. 그러나 장관직은 이완용 계열이 임명되곤 했다. '이왕직 장관과 차관은 총독이 임명했고 직원들은 순종 의향보다 총독부 의향을 존중해 지위 안정을 꾀했다.'(곤도 시로스케)

1926년 2월 11일 이완용이 죽었다. 1909년 12월 22일 이재명 의사에게 허파를 칼로 난자당한 뒤 평생 기침병을 앓다 죽었다. 그리고 4월 25일 순종이 죽었다. 왕 승하 여부는 상관없었다. 명목상이지만 구심점이 사라졌으니 윤덕영에게 쏠린 권력을 재편할 때가 도래했다.

종묘와 권력 투쟁

순종 3년상이 끝났다. 1928년 5월, 쇼토쿠노미야(昌德宮) 이왕 지위를 물려받은 영친왕이 관례에 따라 배향공신 선정 작업을 명했다. 종묘에 왕과 함께 배향되는 공신은 조선왕조 최고의 명예였다. 3대 국왕 태종이 태조 공신으로 7명을 선정한 이래 왕마다 많아야 7명을 못 넘기는 희귀한 영광이었다. 순종은 생전에 아버지 고종 배향공신으로 박규수와 신응조, 이돈우, 민영환을 직접 선정했다.(순종실록부록 순종 19년 6월 11일 순종행장) 당연히 당대 권력 배치도에 따라 결정되는 권력의 거울이기도 했다. 영친왕은 근친 세력인 원로 대신과 친척에게 이 일을 맡겼다.

원로회의와 이완용

5월 3일 원로회의가 소집됐다. 19명 종친 세력이 후보 9명을 뽑았다. 그러자 이왕직 장관 한창수가 후보 한 명을 추가했다. 이완용이었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열아홉 원로들이 모두 반대하며 이유를 물었다. 장관 한창수는 “시노다 지사쿠(篠田治策) 차관 추천이 맹렬하므로”라고 답했다. 신문은 ‘(이왕직) 장시사장(掌侍司長)이 차관과 두터운 관계로 차관을 움직이게 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완용 배향 의례를 치렀음을 기록한 1940년 3월 12일 ‘이왕직 종묘 숙직일지’(왼쪽)와 1928년 공신 선정 때 이완용이 한 표(一點)를 받았다는 ‘이왕직 종묘 배향공신록’.

이왕직 의전담당관인 이 장시사장 이름은 이항구. 바로 이완용의 아들이다. 한 가문의 정신 나간 명예욕, 한 정치 집단의 황당한 권력욕과 식민 총독부 3자 이해관계가 조합된 행각이었다. 열아홉 원로들이 붓으로 낙점(落點)을 했다. 아관파천 후 친러내각 총리대신 충문공 김병시(6표), 을미사변 희생자 충숙공 이경직(4표)과 문헌공 송근수(2표), 효문공 서정순(2표)이 낙점됐다. 이완용은 한 표를 받았다. 장관 한창수에게 부탁을 받은 백작 고희경이 찍은 점이다. 이완용의 형 이윤용도 이완용을 찍지 않았다.

그런데 사흘 뒤 한창수가 들고 온 최종 배향공신 명단에 김병시와 이경직이 빠지고 이완용이 들어가 있는 게 아닌가. 박영효는 '고종 배향공신에 최익현을 올렸더니 시호(諡號)가 없다고 제외하더니, 시호 없는 이완용은 뭔 말인가'라고 했고 민영휘는 '무력한 우리가 떠든들 소용없으나 이유나 알고 싶다'고 했다.(동아일보 1928년 5월 11일) 윤덕영은 이완용과 개와 원숭이 사이였다. 그는 이완용을 "러시아 전성시대에는 친러, 미국 전성시대에는 친미, 러일전쟁 후에는 친일을 한, 지조 없이 교묘하게 처세하는 자"라고 했다.(곤도 시로스케)

'뒷구멍 승자' 이완용 논란 끝에 공신 배향 의례는 무기한 보류됐다. 대신 한창수와 시노다와 이항구 의도대로 '忠(충)' 자 시호를 받은 김병시와 이경직은 공신에서 제외되고 송근수와 서정순, 시호 없는 이완용이 공신록에 올랐다.('이왕직 종묘 배향공신록') 이왕직은 그해 7월 6일 열린 종묘 위패 봉안식('부태묘(祔太廟)'라고 한다)을 옛 의례 대신 신식으로 하기로 결정했다. 종친들은 "차라리 위패만 마차에 싣고 가라"고 비난했다. 의식은 신식으로 치러지고, 원로들은 불참했다.(동아일보 1928년 7월 5일) 철저한 이완용파와 총독부 승리였다.

종묘에 수시로 출몰하는 너구리들.

13년 뒤인 1941년 3월 11일 월요일. 맑고 쾌청한 이날 오전 11시 종묘에서 배향 의례가 열렸다. 문헌공 송근수가 공신당(功臣堂)에 배향됐다. 다음 날 오전 11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배향됐다. 시호가 없어서 ‘大勳(대훈) 이완용’이라 했다. ‘대훈’은 대한제국 시절 받은 대훈위금척대수장(大勳位金尺大綬章)을 뜻했다. 비가 퍼붓고 천둥이 치던 다음 날에는 효문공 서정순이 공신당에 배향됐다.(1941년 ‘이왕직 종묘 숙직일지’) 공식적으로 이완용파의 승리가 선언된 날이었다. 해방이 되고 어느 날 이완용 위패는 쫓겨났다. 전주이씨대동종약회 전례이사 이은홍은 “혼란기에 우물쭈물 들어와서 우물쭈물 기록 없이 나갔다”고 했다.

2018년 이 죽을 것처럼 더운 여름, 그 공신당 앞을 너구리들이 들락거린다. 우물쭈물 들어와서 우물쭈물 놀 거 다 놀고 사라진다. 그런 인생, 한둘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