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민 한국외대 석좌교수·前 국립외교원장

1990년대 초부터 일본 경제는 성장을 멈췄다. 부동산 거품이 꺼지고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늘지 않고 소니·도요타 등 대표 기업들은 활력을 잃었다. 도쿄 긴자 거리에는 빈 택시가 수백m씩 줄지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은 일본 경제를 그로기 상황으로 몰아가 선진국 최장기라는 20년을 넘어 '잃어버린 30년'이 될 것이라는 평가가 줄을 이었다.

그런데 아베 총리가 다시 등장했다. 2007년 집권 1년 만에 존재감 없이 물러났던 그였기에 누구도 예상하거나 기대하지 않았다. 2012년 말 두 번째로 집권한 그는 환골탈태한 듯 강력한 리더십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정체됐던 경제가 되살아나 주가는 2.4배 뛰었고 기업 실적은 버블기에 필적할 정도로 크게 개선됐다. 취직 희망자 한 명당 일자리가 1.43개 기다리고 있을 만큼 실업률이 떨어지고 공전(空前)의 구인난(求人難)이 한창이다. 2011년 한국보다 적던 방일(訪日) 외국인 관광객(622만명)은 6년 만에 3배 넘게 늘어 지난해 2600만명에 달했다. 우리가 앞섰던 줄기세포 분야에서 수많은 한국인이 줄기세포 치료차 일본에 갈 정도로 규제도 사라졌다. 바이오·인공지능·자율주행차 등 4차산업혁명에서 일본 기업은 우리를 앞서고 있다. 이제 도쿄에서 택시 잡기도, 호텔 예약도 모두 어려워졌다.

아베 총리는 올 9월 3연임에 성공하여 이변이 없는 한 2021년까지 최장수 일본 총리를 예약해 놓았다. 허술한 아마추어 같았던 아베 총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한국 언론에선 극우(極右) 성향인 아베 총리가 헌법 개정으로 군국주의 부활을 추진할 것이라는 보도가 주종을 이룬다. 수정주의적 역사관을 가진 그가 때때로 우리와 마찰을 일으키지만 집권 6년간 헌법 개정은 없었다. 일본 군사비는 중국의 5분의 1 수준이고, 지금 추세라면 수년 내 우리 군사비가 일본을 추월할 전망이다. 아베 총리를 객관적으로 봐야 한다.

먼저 그는 이념과 코드가 아닌 실용(實用)을 택했다. 과거 첫 총리 시절 내걸었던 구호는 '전후(戰後) 체제 청산으로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역사 미화(美化)다. 나라가 장기 불황에 신음하는데 생뚱맞은 방향이었다. 5년간 절치부심한 그는 '문제는 경제'라는 점을 깨달았다. 다시 총리가 됐을 때 전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불황 탈출을 위한 구체적 정책을 내걸었다. 금융의 대담한 양적(量的) 완화, 적극적인 재정 확대, 성장 전략이라는 세 가지 화살에 초점 맞춘 아베노믹스를 추진했다. 전문가들은 아베노믹스에 부정적이었지만, 그가 확신을 갖고 일관되게 밀어붙이자 얼어있던 시장이 결국 반응했다.

둘째로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점을 깨닫고 실천했다. 이념에 따라 자신과 코드를 같이하는 인사를 선호하던 1기와 달리, 적(敵)과 '동침'하기도 서슴지 않았다. 국정에서 가장 핵심인 경제와 외교 사령탑을 한때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들에게 맡겼다. 총재 선거 때 경쟁 상대였던 아소 다로 전 총리를 부총리 겸 재무대신으로, 상대 파벌의 장(長)인 기시다 후미오를 외무대신으로 각각 활용한 것이다.

관료를 '적폐'가 아닌 '국정 파트너'로 적극 등용한 것도 돋보인다. 과거 민주당 정부는 관료들을 일본을 망친 적폐로 취급하는 경향이 강했지만 아베는 엘리트 관료들을 중용했다. 아베노믹스의 중요한 축인 양적 완화를 맡을 일본은행 총재에 재무 관료 출신인 구로다 하루히코를, 안전보장회의(NSC)에는 전 외무차관 야치 쇼타로를 기용했다. 우리로 따지면 과거 정권에 부역했던 적폐들이다. 부러운 점은 총리 관저에 각 부처에서 '가장 유능한' 에이스를 모아 어벤저스 군단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한국 경제가 일본형 장기 불황에 들어서고 있다고 경고한다. 놀랍게도 문재인 정부는 소득 주도 성장, 코드 인사, 관료 경시라는 일본 민주당의 실패한 정책을 답습하고 있다. 아베노믹스는 우리에게 일정 부분 활로를 보여준다. 그런데 아베노믹스는 비결이 아니라, 시장에 돈이 돌게 하고 규제를 풀어 기업의 기(氣)를 살려 기술 혁신 투자와 고용을 늘리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트럼프도, 마크롱도 정도 차이가 있을 뿐 같은 처방을 하고 있다. 국익 최우선주의에 따라 실용·실리 노선에 투철한 아베 총리를 보면서 문재인 정부도 실기(失機)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