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03년 개봉한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주인공 경찰 송강호(박두만 역)는 범인이 현장에 아무런 털을 남기지 않는다는 점을 의아해하며 무모증 범인을 찾아 목욕탕을 뒤진다. 박두만이 지금 시대로 온다면 이 방법으로는 범인을 추리기도 힘들 수 있다. 그루밍족(패션과 미용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남자들)을 중심으로 왁싱(waxing·밀랍으로 몸에 난 털을 제거하는 것)이 유행하고 있기 때문. 그루밍(grooming)에는 차림새, 몸단장뿐 아니라 털 손질이란 뜻도 있다. 피부과에서 제모 시술을 받는 남성 인구는 연평균 20~30%씩 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2. 1999년 4월, 31세의 할리우드 배우 줄리아 로버츠는 영국 런던에서 열린 영화 '노팅 힐' 시사회에 겨드랑이 털을 밀지 않고 등장했다. 이는 그가 입은 선분홍색의 비비안탐 드레스보다 더 화제였다. 당시 로버츠가 "페미니스트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남자 친구 벤저민 브랫의 취향이다" 같은 말이 나왔다. 지난달 로버츠는 토크쇼 비지 투나잇에 출연해 "소매 길이와 팔 흔들기를 계산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두 가지가 합쳐지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그러니까 그건 입장 표명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20여 년 만에 사실상 의도하지 않은 실수였다고 밝힌 것. 하지만 결과적으로 로버츠의 행동은 최근 페미니스트들의 탈코르셋(꾸밈의 자유) 운동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왁밍아웃(왁싱+커밍아웃)'하는 남자들

지난 3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한 왁싱숍. 채도 낮은 조명, 피아노 반주 음악, 마음이 안정되는 향까지 갖췄다. 문을 열고 들어간 그곳의 첫인상은 여느 스파(spa·마사지 등을 하는 휴양 시설)와 비슷했다. 푹신한 소파가 놓인 상담실, 따뜻한 차를 서비스로 준다. 안쪽 관리실은 전체적으로 보라색 조명, 침대 옆에는 피부 관리실 같은 스탠드 조명이 있다.

이곳은 국내 최초의 남성 왁서로 꼽히는 정영석 원장이 운영한다. 내년이면 문을 연 지 10년이다. 개업 초기만 해도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 '무모증 치료약' 같은 광고가 붙어 있던 시절이다. 어떤 사람들이 손님으로 왔을까. 정 원장은 "초기엔 영화배우 등 촬영이 많은 연예인 중심이었지만, 최근엔 고소득 전문직 남성이 많이 온다"며 "남성과 여성 비율이 4대6"이라고 말했다.

이곳에서 시술하는 부위는 얼굴에선 눈썹과 인중(입술 윗부분), 헤어라인, 이마, 볼, 턱, 뒷목이다. 몸 관리는 팔, 손, 다리, 발, 겨드랑이, 가슴, 배, 등, 허리, 엉덩이 등이다. 개그맨 박수홍이 아버지와 함께 이마를 제모하는 모습이 TV 오락 프로그램을 통해 공개되기도 했고, MC 전현무는 볼 부분 제모 시술 경험을 고백하기도 했다. 가격은 부위별로 1만~12만원 선. 시술에는 한 시간 정도 걸린다.

그중에서도 손님이 늘고 있는 분야는 브라질리언 왁싱. 몸의 가장 은밀한 부위 털을 제거하는 것이다. 네일케어(손톱 관리)처럼 이니셜, 하트, 번개 등으로 모양을 내는 것이 가능하다.

1980년대 브라질 출신의 자매들이 미국 뉴욕 맨해튼에 매장을 내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할리우드 배우들이 가장 많이 해 '할리우드 왁싱'이라고도 한다. 미국 드라마 '섹스앤더시티'에서 로스앤젤레스(LA)를 방문한 주인공 캐리가 경험해보고 아픔에 비명을 지르는 그 체험이다.

브라질에서는 카니발 등 축제에서 노출 많은 옷을 입는 경우가 많아 왁싱이 발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 역사는 고대 이집트부터 시작한다. 이집트 여성들은 '첫날밤' 이전에 점토나 꿀, 날카롭게 간 조개 껍데기 등으로 제모했다고 한다. 뜨거운 밀랍을 이용해 제모를 한 최초 인물은 클레오파트라라는 말도 있다.

한번 받고 나면 청결과 위생 관리가 편하다. 한 번도 안 받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받는 사람은 없다는 왁싱. 그래서인지 TV 오락 프로그램에서 남성들이 왁싱을 고백하는 '왁밍아웃(왁싱+커밍아웃)'하는 경우도 늘고 있는데, 손님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건 아무래도 고통 정도다. 인터넷 게시판 체험기에는 "구레나룻에 줄을 매달고 번지점프를 하는 기분", "시술이 끝나면 걸을 수 없다" 등의 간증이 이어진다.

왁싱숍 관리사는 "테이프 타입을 이용하는 외국과 달리 국내에서는 대부분 송진을 녹여 결대로 뜯어내기 때문에 아픔이 덜하다"며 "해외 거주자 중 한국을 방문해 왁싱을 받고 가는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왁싱 한류(韓流)라고 하는 이유다. 정확한 통계는 나와 있지 않지만, 국내 왁싱숍은 수천 곳이라고 한다.

왁싱을 한 남자들이 가장 불편한 것은 뭘까. 한 체험자는 "대중목욕탕 가기 부끄럽다"고 했다. 그는 "사우나에 가면 몸에 털이 없는 걸 이상한 눈빛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SBS 오락 프로그램 ‘미운 우리 새끼’에서 방송인 박수홍이 이마 라인을 왁싱하는 장면.

털을 마음대로 할 자유

2011년 개봉한 영화 '러브픽션'에서 여주인공 공효진(희진역)은 겨드랑이 털을 밀지 않고 스크린에 등장한다. 당시만 해도 완벽한 여성에 대한 환상을 깨는 장치로 작동했다. 그러나 이젠 모델들이 광고에서도 제모하지 않고 나온다. 지난 6월 미국 면도기 제조업체 빌리는 여성용 면도기 광고에 제모하지 않은 여성 모델들을 출연시켰다. 빌리 측은 "지난 100년 동안 여성용 면도기 브랜드는 여성의 체모를 인정하지 않았다"며 "광고에선 여성들이 완벽하게 깨끗한 다리를 면도하는 장면만 보여줬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지난해 10월 스포츠 브랜드 아디다스도 다리털을 제모하지 않은 모델을 스니커즈 광고에 등장시켰다. 아디다스 측은 "여자다움과 성별이라는 고정관념에 질문을 던진다"고 했다. 마일리 사이러스와 마돈나 같은 유명 팝 스타들도 자신의 겨드랑이 털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공개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제모가 여성 인권에 대한 포기라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강남의 한 왁싱숍은 "여성 중 가장 많은 손님은 출산을 앞둔 분들"이라며 "병원에서 출산 전에 간호사들이 면도를 해주는데 그게 싫다고 미리 와서 시술받고 가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털은 단지 털일 뿐이다. 국내 탈모 관련 사업은 4조원으로 추산된다. 머리를 심는 것이든, 면도하든 자유인 것처럼, 몸에 난 털 역시 마찬가지. 몸에 난 털을 관리하는 방법에는 왁싱 외에도 면도, 레이저 시술 등이 있다. 면도는 가장 쉽게 스스로 할 수 있는 방법, 레이저 시술은 피부과에서 받는 전문가의 영역이다. 왁싱도 전문 왁서가 시술하나, 국내보다 더 대중화된 미국과 유럽에서는 셀프 왁싱도 많이 한다.

뷰티 업계에서는 최근 왁싱 사업 열풍이 10년 전 네일케어와 비슷하다고 보고 있다. '피가 날 정도로 큐티클(손톱 뿌리를 덮은 얇은 피부)을 제거해야 예쁘게 된다' 등 아픔에 대한 '괴담'이 유포됐고, 젊은 여성을 중심으로 시작했지만 남성으로 확대되며 사업 규모가 커졌다. 네일숍에서 받는 시술의 종류도 일반 컬러뿐 아니라 네일아트, 젤 시술 등으로 다양해지더니 셀프 젤 시술 관리기, 네일 스티커 등도 등장했다. 지금 손톱은 칠하든 붙이든 깎든 각자의 자유. 털이라고 크게 다를 이유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