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山水)가 시골에 머물지 않는 관계로, 화가 민정기(70)씨가 그리는 서울 풍경은 자연히 산수화다. "산은 회화의 유구한 주제다. 당연히 그리는 것이다. 이유가 없다. 다만 산만 있어선 안 되고, 물만으로도 안 된다. 둘이 어울려야 한다. 그러니 산수화다."

대폭의 산수로 유명한 민씨의 개인전이 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에서 3월 3일까지 열린다. 소설가 박태원의 '천변풍경'에 바탕한 '박태원의 천변풍경' 연작을 비롯해 청계천, 사직단, 세검정, 백사실계곡 등 서울의 산수가 담긴 대형 신작 14점이 걸렸다. 2006년 이중섭 미술상을 수상했고, 지난해 남북 정상회담 당시 판문점에 내걸린 산수화 '북한산'으로 대중적 인지도를 얻은 민씨의 2007년작 '묵안리 장수대' 같은 구작 14점도 함께 전시됐다.

신작 ‘청풍계1’(왼쪽)과 ‘청풍계2’ 사이에 선 민정기. 민중미술 화가로 곧잘 소개되는 그는 “그냥 ‘화가’로 불러달라”고 했다.

이번 전시에 이르러 도심으로 옮겨온 그의 초점은 공시성(共時性)을 택하고 있다. 이를테면 신작 '청풍계' 연작은 친일파 윤덕영이 지었던 과거 옥인동 벽수산장과 그 옛터에 가파르게 들어선 지금의 다세대주택을 한 화폭에 담은 것이다. 안견의 '몽유도원도' 이미지에 현재 부암동 전경을 병치한 2016년작 '유 몽유도원' 역시 태곳적 지세와 현실의 변모를 대비해 보여준다. "현장을 답사하고 당시의 풍경에 지금의 풍경을 집어넣는다. 그림이 회고에 머물지 않는다." 이 같은 방식이 시간의 단절을 상쇄하며 장면에 서사를 배가한다.

변화를 모색할 때, 먼저 장소를 바꾼다. 서울서 나고 자란 그는 "다른 공간을 찾아" 1987년 경기도 양평으로 작업실을 옮겼다. "마을 민속 자료나 고지도 등을 모아 그림에 인문적인 정보, 생활의 언어를 넣었다. 그 세계로 들어가야만 볼 수 있는 사료가 있다." 그러다 다시 서울로 시점이 돌아온 것이다. "너무 시골에만 있으니 사람이 나태해지고 도사처럼 변하더라. 도시로 나와 급박하게 돌아가는 모습도 봐야겠더라."

그의 변화는 색(色)에서도 감지된다. 신작의 경우, 그림 전반에 감도는 흐린 노랑과 살구의 빛이 산수를 사람의 낯빛으로 보이게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좋아하는 색이 변한다. 젊을 적엔 청색 위주로 그렸는데, 나이 드니 그 색이 좀 추워 보이더라. 이제 분홍과 빨강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청산만 보였는데 겨울의 누런색을 보게 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상록수는 있다." (02)735-8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