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do 화백'입니다." 그림 뒤에 숨어 있던 김도원 화백이 카메라 앞에 섰다. 그림 속 인물은 옛모습 그대로인데 화백의 얼굴엔 주름이 깊이 팼다. "유머도, 젊음도, 사교성도 그림에 뺏겼어요." 모처럼 활짝 웃었다.

그의 얼굴 아는 이는 적지만 이 그림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활자 더미 속에서 동글동글 천진난만한 얼굴이 말을 건다. 갈피 못 잡고 헤매는 독자를 글의 핵심으로 이끄는 내비게이션. 바싹 마른 기사에 유머로 물길을 낸다.

이 그림 뒤에 숨은 남자가 있다. 본지 코너 ‘리빙포인트’ ‘만물상’ 등을 그리는 삽화가 김도원(84) 화백. 그림 구석 작게 쓴 ‘do’라는 사인 때문에 ‘do화백’으로 더 유명하다. 그린 세월이 장장 60년. 1959년 출판사 민중서관 도안사로 시작, 대한일보를 거쳐 1969년부터 조선일보에서 일했다.

삽화 속 사람은 나이를 안 먹었는데 삽화가 얼굴엔 검버섯이 가득 폈다. 여든넷의 현역. 국내 언론계 종사자 중 최고령이다. 육체는 지팡이에 의지하지만 정신이 펜과 붓을 지배한다. 편집국 구석, 손자뻘 기자들 옆에서 칸막이로 둘러싸인 책상에 앉아 오늘도 그린다.

“재미도, 말도, 사교성도 그림에 빼앗겼다”는 김 화백에게 인생을 들었다. 사무실에서 기자와 김 화백의 거리는 5m. 지금까지 만난 인터뷰 대상 중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그 누구보다 멀었다. 화백은 귀가 어둡다. 10년 전부터 청력이 약해져 거의 안 들린다. 필담(筆談)으로 수차례 기사의 밑그림을 그린 뒤 화백의 60년 그림 인생을 크로키했다. 좀처럼 말을 낮추는 법 없는 그는 필담에서도 꼬박꼬박 존대를 했다.

편집국 구석에 있는 김도원 화백 자리. 매일 2~3시간 안에 4~5장씩 그린다.

하루살이 그림, 60년을 버티다

―팬들이 많습니다. 삽화만 스크랩해 '그림 격언집'처럼 만든다는 사람도 있다 합니다.

"제 그림은 스토리도 없고 벽에 걸어놓을 그림도 아닙니다. 자꾸 보면 잘못된 그림도 좋아 보입니다. 혹여나 마니아가 있다면 제가 폐 끼친 겁니다. 스크랩하지 마십시오. 짧은 시간에 여러 장 그렸기에 완전한 그림이 못 됩니다. 그저 하루살이 그림. 하루 보고 버려 주십시오."

―'국민 삽화가'란 수식도 있습니다.

"글쎄요. 유머 있고 과장 잘하고 섹시할 때도 있고, 매일매일 힘 안 들이고 착착 그려나가는 것을 매력으로 보지 않나 짐작할 뿐입니다. 미안합니다. 제 자랑 해서."

―'섹시'라는 단어가 나온 김에 여쭙겠습니다. 19금 그림이 종종 나옵니다. 간행물윤리위원회로부터 비공개 경고를 받은 적도 있다고요.

요즘 그린 자화상. 신문 삽화에선 사라진 'do'라는 서명이 선명하다.

"야한 것에 끌리는 건 본능입니다. 야한 게 문제가 아니라 야한 걸 저질로 그리느냐 품위 있게 그리느냐가 중요합니다. 재밌는 건 학부모는 항의하는데 학생은 별것 아닌데 왜 야단이냐고 합니다.” 한번은 비아그라 관련 기사에 반나체 여인 삽화를 그렸다. ‘do’라는 서명이 어김없이 붙었다. “do. 하다? 뭘 해? 야릇하다”는 파와 “그렇게 보는 사람이 이상하다”는 파가 나뉘었다.

―얼마나 많이 그립니까.

"하루에 4~5장. 오후 3~4시에 기사가 들어오면 오후 6시까지 그립니다. 장당 30분쯤 걸립니다.” 사무실에서 그는 섬이다. 홀로 그리고, 구내식당에서 ‘혼밥’한다. 대화도 없다. 자신만의 세계에 문을 걸어 잠그고 선승(禪僧)처럼 고독하게 그린다.

―60년을 줄기차게 그렸습니다.

"다른 재주가 없다 보니(웃음). 집사람은 저더러 바보라고 합니다. 딴 길 안 가고 50년 동안 한 회사만 왔다 갔다 한다고. 여행도 안 갑니다. 어디 가면 잠이 안 오고 변비도 심해집니다. 대신 집사람을 자주 해외에 보내고 일주일에 한 번씩 골프도 하게 합니다."

―지겹지 않습니까.

"자기 직업을 힘들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오래 못 가더군요. 저는 취미라고 생각하고 일합니다. 그리기 싫어도 그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안에서 또 내 그림이 나옵니다. 그것조차 즐기면 피곤한 줄 모릅니다."

―매일 마감하는 인생입니다. 체력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힘든데요.

"체질상 술·담배를 전혀 못합니다. 올빼미형이라 밤에 졸려서 자는 일이 없습니다. 수면제도 먹습니다. 평생 건강이 안 좋을 수밖에요.” 늘 건강에 노란불을 달고 살다가 급기야 빨간불이 커졌다. 작년 초 전립선암 수술을 했다. “의사가 고령이라 수술이 될지 모르겠다더니 온갖 검사 한 뒤 해도 되겠다고 했습니다. 회복 후 다시 그릴 수 있다니 행복했습니다.” 복귀한 날 신입사원이 된 듯 떨렸다고 한다.

가난이 키운 그림

―그림으로 이끈 이가 누구였습니까.

"가난이었습니다. 어릴 때 손재주가 좋아 잡동사니로 뚝딱 장난감을 만들었는데 재료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대신 그렸습니다. 종이하고 연필만 있으면 되니. 파지(破紙)마저 없어 울상 지으면 할머니가 달래셨지요. ‘울지 마라. 운다고 종이가 나오느냐.'"

고향은 경북 김천 어모면 첩첩산중. 공무원이던 아버지 따라 학창 시절은 대전에서 보냈다. 서울의 대학으로 진학했을 때 아버지는 “명예 좇기보다 시골에서 편안하게 살아라. 시골에 살면 땅이라도 남지 않느냐”며 말렸지만 그림 향한 아들의 열정은 꺾지 못했다.

―학창 시절 그림으로 날렸겠습니다.

"고교(대전고) 때 교지에 선생님들 얼굴을 그렸는데 화를 내시더군요. 안 예쁘다면서. 재작년 개교 100주년 때 성금 100만원을 보냈습니다."

―서울대 응용미술과를 다니다가 경희대 경제학과로 옮기셨던데요.

"미대에 진학했는데 실기보다 이론을 더 많이 가르쳤습니다. 사진, 조각, 이것저것 다 가르치더군요. 하고 싶은 것 하나만 하고 싶은데 그게 안 되니 견뎌내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어느 대학이든 미달 학과가 많아서 다른 대학으로 옮겼습니다."

기사에 복무하는 그림

―기사 삽화라는 장르를 개척했습니다.

기사보다 더 유명해진 김도원 화백의 삽화. 위는 살림 상식 코너 '리빙포인트'.

"일을 시작했을 때 신문엔 시사만평, 소설 삽화, 연재만화 정도 있었어요. 경제부장이 기사가 딱딱하니 그림을 넣어보자고 해서 삽화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그게 무슨 그림이냐 비아냥거림도 많았습니다."

―삽화의 역할은 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기사 삽화는 만평, 연재만화와 달리 기사에 복무하는 그림입니다. 영화에서 미술감독이 스타가 될 수 없듯 저도 스타가 될 수는 없습니다. 기사와 제목, 그림이 삼위일체 될 때 기분이 날아갈 듯합니다.” 요즘 세대에겐 ‘리빙포인트 삽화가’로 알려졌다. ‘맥주가 미지근할 때는 얼음을 넣으면 시원해진다’는 등 가끔 황당한 내용 때문에 인터넷에서 욕을 먹지만 내용은 김 화백이 쓰는 게 아니다. 담당자가 내용을 주면 거기에 맞춰 김 화백은 삽화만 그린다.

―'최소의 선으로 최대의 내용을 담은 그림'이라고들 합니다. 선이 간결한데 날카롭지 않고 따뜻합니다. 스누피에 나오는 '찰리 브라운'에 비견되기도 합니다.

"제 선(線)은 세월이 만들어냈습니다. 누구한테 배운 적도 없고 스승도 없습니다. 그저 자꾸 그리니 자기 그림이 되더군요.” 신용카드 반만 한 작은 공간에 일상을 압축한다. “용인에서 매일 지하철, 버스 타고 출근합니다. 사람마다 특징이 있어 유심히 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모델이 돼 김 화백의 삽화 어딘가에 녹아있을지도 모른다.

김도원 화백이 그린 자신의 출근길 풍경.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마주친 사람들이 김 화백의 모델이다.

―사진이 그림을 밀어내는 시대입니다.

"먹물로 종이에다 그리던 사람이지만 세상이 바뀌었으니 맞춰야 할 수밖에요. 학원 갈 시간은 없고 후배들에게 꼭 필요한 컴퓨터 능력만 배워 지금은 컴퓨터로 그립니다. 게임하려고 배운 인터넷을 업무에도 활용합니다."

―게임요?

"예전엔 ‘하프라이프’라고 총질 하는 게임이 신났는데 요즘은 ‘오픈 월드 게임’(가상세계를 돌아다니며 구성 요소를 바꿀 수 있는 게임)을 합니다. 어릴 때 사진 보다가 활동사진(영화) 봤을 때의 충격이 떠올랐습니다. 일인칭으로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니 너무 재미있습니다."

―그림 속 캐릭터는 옛 모습 그대로입니다.

"젊었을 땐 10~20년이 길어 보였는데 지나고 보니 1~2년 같습니다. 후배들한테 붕어빵처럼 같은 그림 찍어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정작 제 그림은 그만 굳어 버렸습니다. 변해야 했는데…."

익을 대로 익은 노 화백은 자꾸만 고개를 숙였다. 이름 중간 자 ‘도’에서 따온 서명 ‘do’도 언젠가부터 슬그머니 떼버렸다. “너무 오래 그려 싫증 난 독자가 많을 것 같아서”라고 했다.

"개성이 강하면서도 남을 위해서 존재하고, 순전히 남을 위하면서도 자기가 없어지지 않는다.” 김 화백의 열혈 팬인 문학평론가 이남호(고려대 교수)가 김 화백의 삽화를 두고 한 말이다. 남 위에 군림하려 악다구니하는 세상, 김 화백의 선(線)은 자신만의 선을 지켰다. 침범하지도 물러서지도 않고 60년을 버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