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난생처음으로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 공항에 내렸을 때 나는 이미 에스토니아 영주권자였다. 두 달 전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신청해 발급받은 에스토니아 전자영주권(e-residency)을 주머니에 넣고 갔다. 영주권 카드 실물은 서울 남대문 부근에 있는 전자영주권 발급 센터에서 받았다. 이 카드만 있으면 나 같은 외국인도 에스토니아 국민과 동등한 자격으로 사업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이 에스토니아엔 매년 2만명씩 유입된다. 이 나라에서 한 해 태어나는 신생아 수(1만4000여 명)보다 많다. 대부분 EU 시장을 겨냥해 창업을 노리는 이들이다.

에스토니아선 로봇이 음식 배달 - 에스토니아를 대표하는 기술 기업 '스카이프(Skype)'의 창업자들이 다시 뭉쳐 새로 만든 회사(스타십 테크놀로지스)가 개발한 자동 배달 로봇 '스타십'. 지정된 주소지까지 무인 주행해서 음식을 전달한다.

에스토니아에 간다고 했을 때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은 '어디 있는 나라지?'였다. 에스토니아 인구는 약 130만명으로 대전시보다 적다. 핀란드·스웨덴 같은 쟁쟁한 북유럽 국가 바로 아래 있는 EU(유럽연합)의 초소형 회원국 에스토니아로 전 세계 창업자들이 몰려들고 있다. 전자영주권을 받은 외국인은 지난해에만 스타트업 2000개를 에스토니아에 세웠다. 전자영주권 제도가 생긴 후 5년 동안 설립된 회사가 6000개가 넘는다. 이 자그마한 나라에 스타트업 창업 열풍이 휘몰아친 이유는 무엇일까.

◇이틀 만에 새 회사를 만들다

에스토니아 전자영주권을 만드는 과정은 간단했다. 인터넷으로 여권 정보 등 질문 몇 개만 대답하면 끝났다. 6주 만에 실물카드가 나왔다. 이를 기반으로 계좌를 열고 창업 신청을 하면 인터넷 화상 면접을 거쳐 창업 허가가 난다. 법인을 설립하기 위한 투자금은 2500유로(약 330만원)인데, 처음에 다 낼 필요 없이 10년 안에만 내면 된다. 법인세는 사실상 없다. 소득세 20%만 내면 된다. 탈린에서 만난 스타트업 창업자 군나르 스틴슨(34)은 영국인이라고 했다. 전자영주권 제도를 활용해 영국에 있던 데이터 분석 회사를 에스토니아로 옮겼다. 그는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를 피해 왔다. 여기에 회사를 세우면 국경이나 관세 장벽 없이 유럽 시장 전체를 겨냥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스타트업 기술 집약된 우주센터 - 에스토니아 중부에 자리 잡은 타르투 우주연구센터 연구원들이 최근 이탈리아 위성 발사체의 궤적을 관찰하는 모습. 이 연구소엔 유럽연합(EU) 시장을 노리고 에스토니아에 몰린 스타트업들이 개발한 최신 기술이 집약돼 있다.

에스토니아 땅 한 번 밟지 않은 이들이, 온라인으로만 회사를 세운 경우도 많다. 나는 탐험 출발 일주일 전 전자영주권 동아리에서 알게 된 미국인 친구 이언 웨그너를 만났는데 바로 그런 사례였다. 그는 2015년 전자영주권을 발급받아 컴퓨터 프로그래밍 회사를 만들었다. 한국인 아내와 서울에 살며 유럽 회사에 소프트웨어를 납품한다. 소득세는 에스토니아에 낸다. 그는 한국에서도 창업을 시도해봤다고 했다. "포기했습니다. 한국에서 외국인이 창업하려면 비자 획득에 최소 1억원(법인 설립 자금)을 내야 하고 창업 승인을 받기도 매우 어렵습니다. 변호사까지 선임해 몇 달을 준비했지만 결국 두 손 들었어요. 에스토니아에선 혼자 이틀 만에 법인 설립을 끝냈습니다."

◇"정부가 바쁘면 창업자가 편해진다"

지난 17일엔 탈린 시내 스타트업 공유 사무실 '팔로알토 클럽'을 찾아갔다. 전자영주권 제도를 만들고 총괄한 카스파르 코르유스 전 전자영주권 총괄국장은 지난 2월 퇴직하고 이곳에서 창업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진짜 매력은 법인 설립 그 이후에 있다. 우리는 스타트업이 가장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제도를 치열하게 고민했다"고 했다.

에스토니아는 창업자들을 끌기 위해 규제도 화끈하게 풀었다. 지난 2016년 EU 국가 중 처음으로 승차 공유 서비스 '우버'를 합법화했고, 수도 탈린의 모든 공공도로에서 자율주행 차량이 다닐 수 있도록 허락해 관련 기업을 적극적으로 유치했다. 그 결과 에스토니아를 발판으로 EU 시장 진출을 노리는 전 세계 관련 기업들이 앞다퉈 에스토니아에 들어왔다.

지난 한 해 전자영주권을 받고 에스토니아에 들어온 창업자들이 낸 세금은 약 200억원이다. 고용 창출과 국가 브랜드 제고 등 간접적 이득까지 모두 합하면 에스토니아가 전자영주권 도입 이후 얻은 이득은 2조3000억원에 달한다고 에스토니아 전자정부국은 추산한다. 코르유스 전 국장은 이런 말로 우리를 배웅했다. "정부가 게으르면 창업자들이 바빠집니다. 반면 우리 정부는 스타트업처럼 부지런히 일합니다. 그래야 기업인들이 편해지지요, 하하. 우리가 준비하는 건 국경이 사라지는 미래의 디지털 세계입니다." '에스토니아는 어디 있는 나라지?' 나는 수없이 들었던 이 질문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에스토니아 정부는 정부가 아니다, 스타트업이다"

에스토니아는 디지털 기술에 국가의 운명을 걸고 이를 어떻게 활용할지 결정하는 관제탑 역할을 하는 국가 최고정보책임자(CIO·차관급) 제도를 만들었다. 2년 전 이 자리에 취임한 심 시쿠트를 18일 만나 '디지털 에스토니아' 이야기를 들었다.

심 시쿠트(오른쪽) 에스토니아 최고정보책임자가 지난 18일 탈린 정부청사 사무실에서 이승연 탐험대원을 만나 디지털 전략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에스토니아는 자원도 부족하고, 힘도 없는 작은 나라입니다. 이 나라가 크고 무서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찌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효율성 말고는 답이 없습니다. 그것만이 강해지는 방법이라고 우리는 생각했습니다. 국민이 공감했고, 그런 공감대가 1990년대 인터넷 등 정보기술(IT) 발달의 바람을 에스토니아에 불러왔습니다. 정부 조직을 효율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기존의 관료 문화를 바꿔야 했습니다. 시민의 입장에서 편리한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일종의 스타트업 같은 정부 기구가 필요했습니다. 정부 조직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실패를 두려워하고, 위험을 감수하려 들지 않는다. 이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몇 년씩 계획만 세우고 실행을 안 하는 습성이 있었습니다. 바꿔야 했습니다. 정부처럼 생각하지 말고 스타트업처럼 생각하고 움직였습니다. 과감하게 변화를 추구한 결과 여기까지 왔습니다. '앞서 도전하고 실패하면 빨리 접자(Try fast, fail fast)' 이런 구호 아래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않고 정부 체질을 순발력 있게 바꾸려 애썼습니다. 기술을 혁신하는 것은 정부의 역할이 아닙니다. 시장에 개입하기보다는 자유시장의 원리에 최대한 맡기고, 정부는 새로운 서비스가 창출될 수 있는 공간과 기반 시설을 조성해주는 데에 집중하는 것이 맞는 길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미탐 100 다녀왔습니다] "우리 정부도 몸집 키우기보다 실용 우선 정책 내놨으면"

디지털 기술에 관심 많은 스물한 살 대학생 이승연입니다. 발트해의 작은 나라 에스토니아가 디지털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에스토니아 정부의 관심은 경쟁 국가가 아니라 국민에게 쏠려 있었습니다. '국민을 잘살게 해주자'는 대원칙에서 모든 정책이 나왔습니다. 우리나라는 주변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한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실용적으로 국민의 삶을 우선하는 정책이 필요한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