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치료실에서 만난 사랑의 환자들|프랭크 탤리스 지음|문희경 옮김|어크로스|384쪽|1만6000원

40대 여성 메건은 치과에서 운명적인 사랑을 만났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치과 의사가 자신에게 반했다고 확신했다. 메건은 그에게 수십 번 전화를 걸었고 답이 없자 병원까지 찾아가 몇 시간을 기다렸다. 치과 의사가 거부해도 메건은 "낯선 감정에 겁이 났을 것"이라며 이해한다. 메건은 의사의 흔적이 담긴 물건들을 모아놓고 그와 연결된 기분을 느낀다.

메건은 영국 킹스칼리지런던의 임상심리학자인 저자의 환자였다. 그는 메건을 '클레랑보 증후군' 환자로 분류한다. 상대가 자신을 열렬히 사랑한다고 믿는 정신 질환으로, 피해 대상은 주로 유명인이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남성이었다. 영국 왕 조지 5세도 당했을 정도로 역사가 오래됐다. 버킹엄 궁전 앞에서 하염없이 조지 5세를 기다리던 여성 재봉사는 펄럭이는 커튼을 왕이 보낸 사랑의 신호라 믿었다.

저자가 20년간 심리치료실에서 만난 환자들의 사례를 묶었다. 공통점은 사랑 때문에 아픈 사람들. 범죄 소설 작가이기도 한 저자는 갖가지 사랑의 부작용을 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들려준다. 극단적인 사례지만 이들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비뚤어진 마음을 돌아보게 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의 질투나 집착은 경험해봤을 테니 말이다.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사랑의 위험을 경고하는 책이기도 하다. 임상심리학 박사에게도 사랑과 광기를 나누는 기준은 그리 명확하지 않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왜 어리석어질까. 실제 환자들의 이야기에 역사나 문학 속 사례와 과학 이론을 접목하며 사랑의 본질을 탐구한다. 예를 들어 질투는 사랑과 불가분의 관계이며 인간 본성에 가깝다고 말한다. 원시 사회에서 배우자의 부정은 생존의 위협이 됐기 때문이다. 남편의 불륜은 가정의 자원이 분산될 수 있고, 아내의 불륜은 다른 남자의 유전 형질을 퍼뜨리는 데 자원을 허비할 수 있다.

사랑의 고통을 우습게 봐선 안 된다. 심리치료실을 찾은 수많은 환자를 보며 프랭크 탤리스는 "짝사랑이 자살로 이어지는 예도 적지 않고, 모든 살인의 약 10%가 질투와 관련이 있다"고 했다.

이별 뒤 겪는 상실감은 인간을 무너뜨린다.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별이라면 더욱 그렇다. 치료실을 찾아온 70대 할머니는 밤마다 침실에서 남편의 유령을 본다. 저자는 심리 현상으로서의 귀신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무의식과 강한 소망이 환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실제로 사별한 사람의 80퍼센트가 환각 현상을 경험했다는 연구도 있다고 한다. 그중 대다수는 정신 질환으로 진단받을까 봐 어디에도 털어놓지 못했을 테다.

여자친구에게 버림받고 우울함에 빠진 10대 소년 폴은 헤어진 여자친구를 지나치게 이상화한다. 그는 세상에 없는 완벽한 짝을 놓쳤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괴롭힌다. 폴은 운명 타령을 하며 전 여자친구를 스토킹하기 시작한다. 심리학자가 보기에 죽는 순간까지 운명을 따르겠다는 낭만적 사랑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책에 따르면 낭만이라는 개념은 중동에서 시작됐다. 11세기부터 이슬람 작가들은 사랑 이야기로 대서사시를 썼다. 신에 대한 갈망을 사랑에 빗댄 노래가 서양에 잘못 전파되며 젊은 날의 비통한 로맨스로 정착했다는 것. 저자는 사랑의 진정성을 가늠하는 척도는 "서로 얼마나 가까워지고 싶은지가 아니라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얼마나 계속 함께할 수 있는지에 있다"고 말한다.

환자의 아픔에 공감해야 하는 심리치료자로서 난감한 상황도 겪는다. 정신 질환과 범죄의 경계에 선 환자들을 만날 때다. 아이들 의류 카탈로그를 보며 성적인 상상을 하고 여섯 살짜리 친구 딸에게 사랑을 느끼는 소아성애자나 악령에 사로잡혀 매일 밤마다 매춘부를 찾았다는 망상장애 환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한다. 혐오스럽더라도 어떻게든 이해할 구석을 찾아내는 것이 치료자의 일이다.

사랑의 고통을 가벼이 여기는 이들에게 저자는 사랑을 얕보지 말라고 한다. 사랑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유전자는 미친 듯이 사랑하도록 진화해왔다. 원시 환경에서 아기가 살아남기 위해선 적어도 3~4년간 부부가 애착을 형성하고 자식을 돌봐야 했다. 결혼 후 사랑의 열정이 감소하는 시기도 3~4년 정도 됐을 때라고 한다. 그러니 사랑 때문에 아픈 것은 당연한 일이다. 누구나 사랑의 환자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