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걸스

리자 먼디 지음|이순호 옮김|갈라파고스
612쪽|2만7000원

1943년 11월,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통틀어 최악의 피해를 입었다. 미국 잠수함들이 일본 선박 43척을 격침하고 22척에 손상을 입혔다. 일본 병사들은 식량과 약품을 공급받지 못했고, 항공기들도 부품이 없어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증원 부대도 가야 할 곳에 도착하지 못했다. 이러한 성과 뒤에는 미군의 암호 해독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일본 군대의 암호를 해독해 배의 위치를 추적하고 전략을 파악했다. 태평양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난 데는 암호 해독자들의 공이 컸다. 전후(前後) 언론과 정치권은 암호 해독자들에게 찬사를 보냈지만, 그들의 절반 이상이 여성이라는 이야기는 그 누구도 하지 않았다. 전시에 활약한 약 2만명의 미국 암호 해독자 중 절반이 넘는 1만1000명가량이 여성이었다.

'워싱턴 포스트' 전속으로 베스트셀러 '미셸 오바마 담대한 꿈'을 쓰기도 한 저자는 책에서 '펜대만 굴리던 모범생 여성들'이 어떻게 일본 배를 침몰시켰는지에 주목한다. 1941년 12월의 진주만 공습을 예측하지 못해 충격받은 미군은 최정예 암호 해독 인력을 양성하기로 결심한다. '머리가 좋고, 각종 언어에 능통한 데다, 꼼꼼하며, 입이 무거울 것'이라는 '암호 해독자'의 조건에 걸맞은 후보를 고민하던 미군은 그간 간과되었던 '대학 나온 여자들'에 관심을 기울인다. 해군은 웰즐리 대학과 스미스 대학 등 '세븐 시스터스'로 불리던 동부 명문 여대 졸업생들을 공략하고, 육군은 남부의 여자대학 졸업생들 리크루팅에 나선다.

2차 대전 당시 미 해군 여성 암호 해독자들. 전 세계의 주요 해역에서 사용된 적국의 해군 암호를 해독하는 일을 했던 이들은 공장의 조립 라인처럼 체계적으로 움직이며 일본의 해군 암호를 해독했다.

여성의 대학 진학이 드물었던 1942년, 이 여성들에게 '암호 해독'이란 전례 없는 사회 진출의 기회였다. 대졸 여성 일자리라곤 교사직 외에는 없었던 시절, 교사직 두 배 봉급을 주는 데다 수도 워싱턴에서 일할 수 있다는 매력적인 조건이 똑똑한 여성들을 암호 해독자의 길로 이끌었다. 지금은 전시(戰時) 암호 해독이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으로 잘 알려진 영국 수학자 앨런 튜링 같은 '천재 남성'의 일로 여겨지지만, 1940년대 초반에는 그렇지 않았다. "암호를 해독하는 일에는 남성보다 여성이 더 적합하다는 말은 칭찬이 아니었다. 아니, 그 반대였다. 그것은 여성들이 재능을 비약적으로 쓰는 일보다는 지루한 일을 더 잘할 것으로 생각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40쪽)

극비 사항인 암호 해독을 비밀리에 진행하기에도 여성보다 남성이 더 적합하게 여겨졌다. 수천 명의 여성이 동원되었지만, 사람들은 그들이 중요한 일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공개 석상에서 직무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휴지통 비우는 일과 연필 깎는 일을 한다고 말하도록 훈련받았다. 부대 지휘관의 무릎 위에 앉기도 한다고 순발력 있게 대답할 수도 있었다. 사람들도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미국의 젊은 여성들이 자신은 저급한 일을 하거나 남자의 노리갯감일 뿐이라고 말하며 호기심 많은 외부인을 납득시키기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35쪽)

지원자 대다수의 교사 경력도 긍정적으로 평가됐다. 교사들은 똑똑하고, 힘든 일을 하는 데 이골이 나 있었고, 높은 봉급을 받은 적도 없으며, 젊으면서도 신중했고, 거치적거리는 아이나 남편이 없는 경우도 많았다. 요컨대 완벽한 일꾼이었다. 전시의 어느 보고서에는 "그 소문난 '노처녀' 선생은 철저한 '닭장의 지배자'에서 '많은 닭 중의 하나'가 되는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했지만 그래도 이곳에 있는 다수의 최고 일꾼들은 교사 출신"이라고 적혀 있었다.

군의 '브레인'으로 중요하게 여겨졌지만 각종 편견에 시달리기도 했다. 남자 군인은 종종 이들을 '제복 입은 매춘부'쯤으로 여겼다. 아들을 전장에 내보낸 어머니들이 여성들이 입대해 사무직을 차지하는 바람에 아들이 전쟁터로 갔다며 원한을 품기도 했다. 미 국가안보국 최초의 여성 부국장 앤 카라크리스티처럼 전쟁이 끝난 후에도 능력을 인정받아 직업을 가질 수 있었던 여성도 있었지만, 많은 여성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경단녀'가 되었다.

전쟁처럼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으로 여겨지는 분야에서 그간 잊혔던 여성들의 공헌을 찾아내 재조명하는 것이 요즘 페미니즘 글쓰기의 주요 갈래다. 이 주제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2차대전 때 우라늄 농축을 한 미국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아토믹 걸스'나 같은 시기 독일군 정보 도청을 한 영국 여성들을 들여다본 '계획된 불평등'도 함께 읽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