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종료를 조건부로 연기하겠다고 했다. 이와 함께 일본은 수출 규제 해제를 논의하는 국장급 대화를 재개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종전 방침에 변화가 없다는 발표도 했다. 결국 얻은 것도 없이 뽑았던 칼을 칼집에 다시 넣게 된 것이다. 지소미아는 단순히 한·일 간 협정이 아니라 한·미·일 안보 협력의 상징이자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기본 틀'이다. 만약 종료를 강행했다면 한·미 동맹은 수렁에 빠졌을 가능성이 높다. "모든 원인과 책임은 일본에 있다"며 큰소리치던 정부가 종료 시한을 6시간여 앞두고 입장을 바꾼 것도 이런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사 문제에 수출 규제를 끌어들이며 안보 신뢰 문제를 제기한 일본 책임이 크지만, 맞불 조치라고 엉뚱하게 지소미아 폐기 카드를 꺼낸 것은 문재인 정권의 패착이었다. 한·일 갈등에 중립을 지키던 미국은 한·미·일 3각 협력을 깬 책임을 한국에 물었고, 한·일 갈등이 한·미 갈등으로 비화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정작 일본에는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문 정권이 반일(反日) 카드로 국내 정치 시선을 돌리겠다고 파기를 밀어붙였다가 명분도 잃고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을 자초했다.

지난 3개월간 국론은 분열됐고 남은 건 동맹 훼손뿐이다. 특히 미국의 압박은 한·미 동맹에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수준이었다. 미국은 '한·미가 조율했다'는 청와대 해명을 "거짓말"이라고 일축했고, 우리 군의 독도 방어 훈련을 "도움 안 된다"고 문제 삼았다. 미 국무부, 군 수뇌부가 총출동해 '지소미아 유지'를 압박한 데 이어 미 상원은 초당적 결의안에서 '한국 결정으로 주한 미군이 위험해지고 미 국가 안보에 직접 피해를 줄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국에 우호적인 사람들까지 한목소리로 우려를 표시했다. 한국이 지소미아 문제를 계속 국내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한다면 이런 우려는 분노와 불신으로 커질 것이다. 미국이 신뢰가 깨진 한국과 동맹 관계를 재설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이미 미 고위 당국자들이 금기(禁忌)나 다름없던 주한 미군 철수·감축론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방위비 인상 압박도 한층 거세질 것이다. 안보 리스크로 한국 경제의 신뢰도도 흔들릴 수 있다.

한·미·일 균열로 득보는 것은 북한·중국뿐이다. 북한은 한국을 겨냥한 미사일 능력을 더욱 고도화하고 있고, 중국은 패권적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우리가 알아서 저들을 도와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존심을 세우고 지지자들이 좋아한다고 국익을 해치는 자해(自害)를 한다면 대통령의 직권 남용이다. 지소미아 파기가 실리와 명분, 국익을 모두 훼손한 것이 확인된 이상 종료 연기가 아니라 철회를 선언하고 한·미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그게 일본의 수출 규제를 푸는 데도 더 효과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