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기 가장 좋은 날씨는 무엇일까. 인생의 많은 순간이 그렇듯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 비가 오면 축축한 습도가 주는 감상을 즐기고 쾌청하면 채도 높은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산문집 '제국의 뒷길을 걷다'의 작가는 비 오는 날의 중국 자금성을 좋아한다고 고백한다. 관광객이 그나마 적다는 이유에서다.

겨울에 베이징 여행을 가는 게 좋은 일일지 그렇지 않을지 의견을 구하는 글 제목을 인터넷 게시판에서 보고 클릭했다. 나는 이런 글은 반드시 클릭한다. 남반구가 아니라면 '거긴 너무 추워요'라고 절대다수가 반대할 것임을 알지만 그럼에도 나오는 소수 의견을 읽기 위해서다. 역시 '너무 춥다' '미세 먼지가 심각하다' '자금성 걷다가 죽는 줄 알았다' '엄청 건조하다'라는 의견이 다수였다. 반대를 뚫고 '겨울 베이징'을 추천한 의견 중에 '겨울은 겨울대로 좋다'는 글을 보고 웃었다. 남들이 기피하는 몬순기에 꼭 동남아를 간다는 누군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왜요?'라고 묻자 그는 말했다. '세상에 그렇게나 많은 비는 없거든요!'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비가 오지 않으면 오지 않는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춥지 않으면 춥지 않은 대로 좋은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많은 것이 달라진다.

그래도 베이징을 갈 시기를 선택하라면 나는 비가 오는 날을 고르겠다. 이런 문장을 읽었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는 북경, 고궁을 찾아간다. 비를 좋아해서도 아니고, 축축한 감상에 젖어서도 아니다. 일 년 열두 달 내내, 사람이 드문 고궁, 즉 자금성을 구경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기온이 사십 도 가까이 오르는 한여름에도, 코가 떨어질 듯한 한겨울에도 자금성은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 평일이든 휴일이든, 자금성은 사람으로 넘쳐나 풍경은 사람의 어깨와 머리에 가려져 있다. 나는 온전한 자금성을 구경하기 위해 비 내리는 아침 고궁의 문을 들어서지만, 사실 온전한 자금성은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 십 년 만에 다시 꺼낸 이 책을 들고 나는 꼭 비 오는 날 베이징에 가야겠다고 결심한다.

어느 책을 온전히 읽어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책을 읽을 때 내가 충분히 집중할 수 없는 상태였을 수도 있고, 감정이 메말랐을 수도 있고, 그 책을 읽어내기에 지적 경험이나 인생의 경험이 부족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예전에는 별로였는데 시간이 지나서 읽어보면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하게 하는 책들이 생기게 된다. 이 책은 예전에도 좋았고, 지금도 좋다. 이 책 제목은 '제국의 뒷길을 걷다'로 소설가 김인숙이 쓴 베이징에 대한 산문집이다. 십 년 후의 나는 십 년 전에 내가 그어 놓은 밑줄과 낙서를 다시 보면서 다른 곳에 또 밑줄과 낙서를 한다. 그러고는 잠시 멈추어 다른 책을 찾아보고, 메모를 하기도 하고 그러느라 책을 더디게 읽게 된다.

또 상상한다. 2006년 일 년 반 동안 중국, 그것도 베이징에 머물면서 작가가 걸었을 베이징의 길들과 만났을 사람들, 그리고 당시 구상했다는 소설들에 대하여. 책날개에 작가는 베이징에 머무는 동안 지인이 찾아오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서 얼굴이 달아오르곤 했다고 적고 있다. 또 이렇게 덧붙인다. "이 글은 북경에 관한 모든 이야기는 아니다. 물론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 중의 가장 뜨겁고, 가장 재미나고, 가장 긴 이야기인 것은 사실이다." 맞는다. 이 책은 그런 이야기다. 뜨겁고, 재미나고, 들어도 들어도 끝날 듯하지 않은 길고 긴 이야기.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얼굴이 상기된 채 이야기에 취해 있고. 십 년 전의 나였다면 꼭꼭 숨겨두고 나만 읽었을 책이다. 왜냐하면, 한 문장 한 문장을 지날 때마다 세상의 어떤 비밀을 알 듯한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1626년, 명나라 천계제 6년 봄,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뇌성이 울리며 베이징 땅이 흔들린다. 코끼리 떼가 우리를 뛰쳐나오고, 2만 명이 넘는 사람이 땅속에 묻히거나, 무너진 건물에 깔리거나, 코끼리 떼에게 밟혀 죽었다. 지진이었다. 가장 먼저 궁을 빠져나갔던 황제는 죽거나 죽지 않은 그의 백성이 모두 나신인 것을 보게 된다. 이 옷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옷들은 베이징 서쪽에 있는 산에서, 북쪽 벌판에서 발견된다. 수없이 많은 옷이 나뭇가지에 걸친 채로 산을 이루고 있었다. 작가는 이 기묘한 이야기가 명대 사학가인 여담천이나 계육내 같은 학자의 책에 남아 있다며 인용한다. 나는 여기까지 읽었을 때, 이 책이 영문도 모른 채 발가벗겨진 사람들과 그들의 사라진 옷과, 사라진 옷이 발견된 장소에 대한 이야기임을 알 수 있었다.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수도였던 베이징은 우리가 흔히 아는 것처럼 '연경'이라고도 하지만 '수향(水鄕)'이라고도 했다. 맑은 물이 넘쳐나 온 도시가 '물 냄새와 버드나무 푸른 잎 냄새'로 가득했었다 하니 지금으로서는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그리고 '문의 도시'였다. 문이 많다는 것은 성벽이 많다는 것, 1950년대까지만 해도 베이징은 스물세 개의 성벽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도시였다. 나는 이 사실을 이 책에서 읽고 현기증이 났다. 역사 시대를 다룬 중국 영화를 볼 때 클리셰라고 생각하면서도 번번이 매혹되었던 것이 바로 그 겹겹이 둘러싼 성벽과 열어도 열어도 계속 나오는 문 때문이다. 이 담과 문은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으로 거의 철거되고, 성벽과 문에서 나온 벽돌은 새로 건설된 공장에 쓰인다. 작가는 마오쩌둥이 성벽을 철거하려 했을 때 극렬히 반대했던 건축가 량쓰청의 말에 공감하며 '여기 그대로 모든 것이 있었다면' 베이징이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가슴 아파하는 한편, 십억이 넘는 그의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했을 마오쩌둥의 절박함에 대해서도 공감한다. 또 마오쩌둥이 없었더라도,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가 계속 집권했었더라도 아마 성벽은 철거되었을 거라고 적는다. 왜냐하면, 자전거광이었던 푸이는 문턱을 넘기 어렵다는 이유로 궁중의 문턱을 모두 없앴기 때문에, 계속 집권했더라면 교통에 방해되는 성곽을 없애라고 했을 거라는 논리다.

푸이가 궁중에 있던 시절, 그러니까 그가 허울뿐인 황제로 있던 때에도 궁중에는 칠백여 환관이 있었다(환관이 가장 많았다는 명나라 숭정제 때는 십만 명이나 됐다 한다). 작가는 이렇게 적는다. "그러니 관광객으로 가득 찬 고궁은 어쩌면 고궁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일 터이고, 관광객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궁이라는 무대에서 환관이 되거나 궁녀가 되거나, 혹은 황제가 되거나 황후가 되거나, 기꺼이 배역 하나씩을 맡고 있는 셈인지도 모르겠다." 환관의 배역을 맡는다면, 십만 명 속의 한 명보다는 칠백 명 속의 한 명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 오는 날이나 추운 겨울에 베이징에 간다면 칠백 명 속의 한 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십만 명 중 한 명이라도 그 나름대로 또 좋을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