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8월 21일. 대구 북방 22㎞ 다부동 전선(戰線)이 급박해졌다. 천평동 협곡 좌측방 고지를 지키던 국군 1사단 11연대 1대대가 북한군 공세 소문에 후퇴하고 있었다. 고지가 적에게 넘어가면 협곡 아래 있던 미 27연대의 퇴로가 막히고, 다부동 전체 전선이 무너질 수도 있다. 백선엽 1사단장은 지프를 타고 최전선으로 달려갔다. 산등성을 내려오는 장병 앞을 막아섰다. "우리가 더 물러설 곳은 없다. 내가 앞장선다. 내가 두려움에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쏴라." 백선엽은 권총을 뽑아 들고 적들이 넘어오는 고지를 향해 뛰어 올라갔다. 그러자 장병들이 뒤를 따랐고 고지를 재탈환했다. 군에서 '사단장의 돌격'이라 부르는 일화다.

지난달 24일 오전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사무실에서 김형석 교수와 '문무(文武) 100년의 대화'를 가진 백 장군은 당시 일을 회고하며 "물불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이곳이 무너지면 대한민국이 무너진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했다.

다부동은 6·25전쟁 당시 최고 격전지였다. 서울~대구~부산으로 이어지는 핵심 축 선상에 있다. 백 장군이 이끄는 국군 1사단이 이곳에서 북한군 3개 사단의 맹렬한 공세에 맞서 싸웠다. 매일 사상자가 700~ 800명 발생했다. 여기서 졌다면 대구·부산마저 점령당해 대한민국이 지도에서 사라졌을 수도 있다. 이후 연합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뒤 대대적 북진에 나서게 된다. 김 교수는 이날 백 장군 손을 꼭 잡으며 "그때 잘 싸워주셔서, 나라를 지켜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일원이 되다

―일제 지배에 이어 6·25전쟁이란 큰 시련을 맞았지만 우리 민족은 이를 국가 부흥의 발판으로 삼았다.

: 러시아 공산 혁명 이후 전 세계에 공산주의가 크게 퍼졌다. 동유럽과 중국, 동남아, 북한까지 진출했다. 6·25 전쟁은 세계사적으로 급격히 팽창하던 공산주의 세력을 처음으로 저지했다는 의미가 있다.

: 다부동 전투 때 난 부산으로 피란 갔는데, 모든 국민은 백 장군이 잘 싸워서 제발 우리나라를 지켜달라고 빌었다. 다부동이 무너지면 김일성이 부산까지 다 점령해 버리게 될 거라고들 얘기했다. 그곳은 대한민국의 생명선이었다.

전쟁이 터졌을 때 대령이었던 백 장군은 1950년 7월 준장을 단 이후 초고속 진급을 거듭해 1953년 1월 대한민국 군 역사상 최초로 대장 계급장을 달았다. 부산의 임시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오른쪽 어깨에, 제임스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이 왼쪽 어깨에 별 넷 계급장을 달아줬다. 이 대통령은 "자넨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이야. 옛날엔 임금만이 대장이었지. 지금은 리퍼블릭(공화국) 아닌가"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24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429호 백선엽(오른쪽) 장군 사무실을 방문한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에게 백 장군이 군 복무 시절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다.

: 전쟁으로 수백만 명이 희생됐고, 전 국토가 쑥대밭이 됐지만 얻은 것도 있다. 북한과 공산당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됐고, 우리나라가 미국 주도의 자유민주주의 진영에 본격 합류하게 됐으며, 어떻게든 실력을 키워 살아남아야 한다는 민족적 의지를 더욱 다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 역설적이지만 6·25전쟁은 대한민국이 국제화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미군과 유엔군이 들어오면서 자유민주주의화가 급속하게 진행됐고, 일본과 가까워지면서 경제적으로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 전쟁이 계기가 돼 우리가 이렇게까지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은 "최근 들어 국내에 북한 공산 세력을 너무 모르고, 심지어 친북·종북 성향의 세력이 발호하는 분위기가 있어 대단히 걱정스럽다"고 했다. 김 교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처칠 총리는 '아직 공산주의와 3차 대전이 남아 있다'고 했는데, 미국 사람들은 그를 정신병자라고 했다"며 "그런 방심 결과, 한반도에서 6·25전쟁이 터졌다"고 말했다.

: 1972년 7·4 공동성명 발표 당시 이탈리아를 여행하다 한 전직 공산당원을 만났다. 그는 18년 동안 공산당에 몸담다 전년도에 탈당했다며 '한국은 절대로 북한을 믿으면 안 된다. 공산주의엔 민주주의도, 휴머니즘도 없다. 얼마든지 거짓말을 한다. 자신들 목적을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더라. 이 말을 문재인 대통령이 들었으면 좋겠다.

◇두 巨人, 그들의 리더십과 그림자

―지난 100년 우리 민족, 대한민국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성공을 만들었다. 누구 얼굴이 떠오르나.

: 단연 이승만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개인으로 이름을 남길 사람은 그 두 사람뿐이다. 이승만은 독립과 건국, 전쟁 과정에서 대한민국을 자유와 민주 세계로 이끌었다. 미국과 강력한 동맹 관계도 구축했다. 자유민주 진영 쪽으로 가지 않았다면 지금 우린 가난한 아프리카 나라처럼 됐을 수도 있다. 박정희는 우릴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게 해 줬고, 이후 경제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 세계 흐름을 꿰뚫고 있었던 이승만은 높은 학식, 강한 의지력, 굳건한 민족적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6·25 때 미군이 우리 국군의 전투 능력에 불만을 표시할 때면 미국 헌법 정신을 거론하며 강하게 꾸짖기도 했다. 민주·자유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미국 건국 정신을 들며 약소국 한국의 사정을 이해 못 하냐고 했다. 그럴 때마다 워커·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 도쿄에 있던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 등이 진땀을 뺐다. 하지만 슬하에 자녀가 없었던 이승만은 말년에 군부대 시찰 때 야산의 묘를 가리키며 "저곳은 어느 집안 묘역인가"라고 묻고는 "집안이 잘 이어지는군" 하며 씁쓸히 말하곤 했다.

백 장군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맺은 특별한 인연도 털어놨다. 해방 이후 통위부(지금의 국방부) 정보국장(대령)을 맡고 있던 백 장군은 군에 침투한 좌익·공산 세력을 뿌리 뽑는 숙군(肅軍) 작업을 총지휘했다. 이때 남로당 군사책으로 활동하다 잡혀 열흘 정도 뒤 수색에서 총살형을 앞두고 있던 박정희를 풀어줬다. 1917년생인 박정희는 백 장군보다 세 살이 많았지만 군 합류가 늦어 당시 소령이었다.

대장에 진급한 백선엽(맨 왼쪽) 장군이 경무대에서 이승만(맨 오른쪽) 대통령을 만나 악수를 나누는 모습.

―특별한 인연이 있어 석방했나.

: 아니다. 박 소령은 그저 자신을 한번 살려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짧은 경상도 사투리였는데 뭔가 진한 진심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렇게 해봅시다" 했다. 사실 당시 숙군 과정에서 실제 처벌받은 사람은 일부였고, 연행자(4749명)의 90%는 군문을 떠나게 하는 차원에서 마무리했다.

: 박정희의 성공에는 뛰어난 용병술도 크게 작용했다. 정주영·박태준 등 인재들이 큰일을 할 수 있도록 해줬다.

: 박정희는 나중에 대통령이 된 뒤에도 나를 '형' 또는 '백형'이라고 불렀다.

―1980년대 이후에도 기적적 경제성장과 민주화라는 성취가 이어졌다.

: 이승만·박정희 두 사람이 뿌린 씨앗 덕분이다. 이후엔 대통령 개인의 역할이란 의미는 별로 없다. 예를 들어 전두환이 집권했을 때 박정희가 키운 경제를 망가뜨리면 어떡하나, 교육을 망칠 거야 하고 걱정했다. 그런데 대통령 되더니 난 경제 몰라, 교육도 몰라 하면서 모두 전문가에게 맡겼다. 그게 경제와 교육을 살렸다. 민주화도 우리 사회의 민주화 세력이라는 큰 흐름이 만들어졌기에 가능했다.

―국내엔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하면서 사회주의적 개혁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

: 공산·사회주의는 유럽에서든, 아시아에서든 자유민주주의를 이길 수 없다. 해방 후 공산주의 좌익 세력은 모든 자산을 모든 사람이 함께 소유하자고 하더라. 불가능한 꿈이다. 공산주의를 내세웠던 그 어떤 나라도 그런 이상적 사회를 현실에서 구현한 적이 없다.

: 일제 때 경성제대 3대 천재는 유진오, 이강국, 내 친구 박치원의 형인 박치우다. 치우 형은 안국동에서 현대일보를 만들어 가장 늦게까지 좌파 운동을 했다. 6·25전쟁 나자 치우 형제는 모두 북한으로 갔는데 이후 종적이 사라졌다. 남한에 있던 좌파 인사들은 북한 가서 다 숙청당했고, 우리 같은 북한 출신들은 남으로 내려왔는데 대한민국이 받아줬다. 남한에 있던 사람과 월남한 사람들이 힘을 합쳐 대한민국을 빠르고 크게 성장시켰다. 안병욱 선생과 만나면 늘 이런 얘기를 했다.

[내 인생의 가장 빛난 날은…]

白 "신나게 평양 입성 1950년 10월 19일"
金 "인생의 열매 나눠주던 60~75세"

―인생 최고 전성기는 언제인가.

: 1950년 10월 19일이다. 1사단장으로 국군과 일부 미군 장병 등 1만5000명을 이끌고 북한 수도 평양에 첫발을 들여놨다. 우린 6·25전쟁이 터진 후 다부동에서 김일성의 공세를 막아낸 후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집고 북진에 나섰다. 그때 정말 신났다. 공산당을 물리치고 곧 통일이 될 것 같았다. 낮엔 패튼 장군처럼 1호 전차에 올라 진격했고, 밤엔 내려 장병들과 함께 걸었다. 내가 "평양"이라고 외치면 장병들은 "진격"이라고 외쳤다. 평양 입성만은 미군에게 뒤지고 싶지 않았다. 결국 미군보다 15분 앞서 평양에 '1착'했다. (평소 잘 웃지 않는 백 장군은 이때 입가에 얇은 미소가 번졌다.)

: 내 경우는 60~75세였다. 이 나이까지 살아보니 인생은 3단계인 것 같다. 처음 30세까지 1단계는 배우는 시기, 60세까지 2단계는 일하는 시기, 그리고 3단계는 제2의 인생을 사는 시기다. 회갑 되고 정년을 맞았는데 강의도 더 잘할 것 같고 학문에 대한 의욕도 더 많아졌다. 이때는 나무로 보면 열매를 맺어 나눠 주는 단계다. 사회를 위해 살게 되더라. 철이 들고 사람으로서 성장한다. 기억력은 떨어지는데 사고력이 커진다.